그대 없이는

2021.05.12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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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없이는


국내 민간업체에 와인 수입이 처음 허용된 것은 1987년입니다. 이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은 와인이 특정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대중화되었지요. 무엇보다도 마트에 있는 와인코너를 보면 알 수 있어요. 국내의 문학작품 속에서도 와인이 점점 자주 등장하는데,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해요. 이제 와인은 문학에 있어서도 더 이상 서양의 전유물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야 말할 것도 없지
붉은 포도주지
애모의 슬픈 고백과도 같은
타오르지 못한 말씀의
매운 연기와도 같은
절규하는 장미의
꽃잎을 으깬
슬픈 눈물의
아름다운 목숨의
붉은 것으로 주세요
진한 노래를”

이향아 시인의 시집 『종이등 켜진 문간』에서 발표된 시 <붉은 포도주>에는 이렇게 씌어 있어요. ‘붉은 포도주를 드릴까요 흰 포도주를 드릴까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 지속할 수 없는 사랑을 붉은 포도주로 멋지게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붉은 포도주를 마실 수 있겠어요? 아직 완전히 숙성되지 않아 전성기에 이르지 않은 포도주는 마셔도 무방하지만, 사랑이 미완성으로 끝난 것을 즐길 수는 없잖아요.

“입으로야 어찌 마시랴
눈으로 삼킨다”

이렇게 이어져 갑니다. 괴로움을 견뎌내는 과정을 표현하고 있어요. 기억하고 싶은 시간들을 간직하겠다고 합니다. 눈으로는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아직 못 보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표현이 기가 막힙니다. 이향아의 다른 시집 『환상일기』에 나오는 시 <그리운 영원>에서도 포도주는 입이 아니라 눈으로 들어갑니다.

“누가 내 눈에 포도주를 채웠는지
취기 같은 슬픔으로 움트던 고독”

이제 헤르만 헤세가 1913년에 발표한 <그대 없이는, Ohne Dich>이라는 시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Nun trink ich Weh in jeder Lust
Und Gift in jedem Wein;
So bitter hatt ich’s nie gewußt,
Allein zu sein,
Allein und ohne dich zu sein!“

“지금은 어느 기쁨도 슬픔이 되고
포도주 잔마다 독이 된다.
홀로 있다는 것,
홀로 당신 없이 있다는 것,
그것이 이리 쓰린 것은 미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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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회준 작가의 조각작품 <Wine Lover>/

 


저는 헤르만 헤세를 참 좋아하는데 이향아의 <붉은 포도주>가 슬픔의 표현에서 제 가슴에 더 와 닿습니다. 어쩌면 동양적인 정서와 서양적인 정서의 차이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시 전체를 읽어보면 이향아의 시에는 여백이 있어요. 반면에 헤세는 위에서 소개한 부분의 앞에서 홀로된 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사실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Ich lieg allein im stillen Haus,
Die Ampel ausgetan,
Und strecke sacht die Hände aus,
Die deinen zu umfahn,
Und dränge leis den heißen Mund
Nach dir und küß mich matt und wund –
Und plötzlich bin ich aufgewacht
Und ringsum schweigt die kalte Nacht,
Der Stern im Fester schimmert klar –
O du, wo ist dein blondes Haar,
Wo ist dein süßer Mund?“

“적막한 집에 홀로 누워
등불을 끄고는
당신의 손을 잡으려고
가만히 두 손을 뻗으며,
뜨거운 입술을 살며시
당신 입에 대고 지칠 때까지 애무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을 뜨면
주위엔 차가운 밤이 내리 깔리고
창 밖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
아~ 그대의 금발은 어디 있는가?
달콤한 그대 입술은 어디 있는가?”

헤세의 외로움과 슬픔은 캔버스에 꽉 차면서도 쉽게 그림으로 그려집니다. 이향아 앞에 놓인 ‘붉은 포도주’는 헤세가 <그대 없이는>에서 마시는 포도주와는 달리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향을 가진 것이어야 어울릴 것 같아요. <붉은 포도주>가 선사하는 여백은 이러한 향에 의해서만 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붉은 포도주>는 이우환 화가가 샤토 무통 로칠드(Château Mouton-Rothschild)의 2013년 빈티지를 위한 레이블에 그린 그림을 연상시킵니다. 샤토 무통 로칠드 측은 이 그림이 “연한 자줏빛이 짙어져서 마치 위대한 와인이 오크통 안에서 천천히 완성되어 가는 것과 같다”라고 설명하지만, 저는 이향아의 ‘붉은 포도주’가 세월이 지나면서 그 빛을 바래가는, 슬픔의 정도가 견딜만하게 변하는 모습과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해석하고 싶은 거죠. 마치 옛날에 세로쓰기를 하면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썼던 것처럼요. 어쩌면 제가 중년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그런가 봅니다. 포도주로 비유하면 이미 꺾이기 시작한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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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토 무통 로칠드 2013 빈티지의 레이블/ 



보르도의 유명한 와이너리 샤토 샤스-스플린(Château Chasse-Spleen)은 “향수는 우울함의 일부분이지만 우리의 와인은 우울함을 없애버리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와인의 세계에 존재하는 향수라는 거대한 마케팅을 거부합니다. 이것은 샤스-스플린이라는 이름이 생긴 배경과 연관되어 있어요. 영국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이 유럽의 남부지방을 다니다가 1809년에 이 와이너리에 들려 와인을 마시고는 우울함을 떨쳐버리는 데는 이만한 것이 없다고 말하며 샤토 샤스-스플린을 극찬했다고 한데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고 합니다.

“What remedy to dispel the spleen (Quel remede pour chasser le spleen)!”

프랑스의 문학가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가 발표한 시집 『악(惡)의 꽃』(Les Fleurs du Mal)에 있는 시 <우울, Spleen>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1863년에 개최된 런던 만국박람회에서 와인을 선보이기 위해 와인의 이름을 고민할 당시 이 시집의 삽화를 그린 오딜롱 르동(Odilon Redon)과 교류했다는 것이 근거로 제시됩니다. 샤토 샤스-스플린이 소개하는 자료를 보면 바이런과 르동의 이야기가 모두 언급되어 있어요. 모두 샤스-스플린이라는 이름이 탄생하는데 공동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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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신의 물방울』에서 샤스-스플린을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뜻으로 소개한 이후 이 와인은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이 와인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매년 레이블에 시의 한 구절이나 명언이 인용되고 있다는 사실도 점차 알려지고 있지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로 인해 슬플 때 이향아처럼 레드 와인을 눈으로만 삼키지 말고, 헤르만 헤세처럼 독을 마시는 느낌도 갖지 말고, 바이런처럼 샤토 샤스-스플린 한 잔 마시며 슬픔을 달래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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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박찬준 (Chan Jun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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