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물이 포도주로 변할 때

2021.05.12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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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물이 포도주로 변할 때

 

“기억은

시간의 저장소가 아닙니다.”

 

휘파람 소리같이 지나가는 시간들과 사건들을

욕망의 참나무통 안에 가두어 발효시키는 것

 

철 지난 포도알들이 노을처럼 불타다가 터지면

그때 당신은 내 일상의 기억들을 발효시키는

지하실의 어둠이 되어 찾아오십니다.

 

당신은 거기에서

오래 침묵하는 법과

아픔을 참는 법과

눈물 없이 망각하는 법을

일러주십니다.

 

이제는 늙어 마지막 내 한 방울의 젊음이

가을 벌판에 쏟아지는 찬비가 되는 날

비로소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따르라 빈 잔에

눈물처럼 고이게 하지 말고

희열의 샘물처럼

사랑의 잔을 넘치게 하라.

 

맹물의 기억은 오로지

당신의 지하창고의 어둠 속에서만

진한 향기의 포도주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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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 꼽히는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이 쓴 <맹물이 포도주로 변할 때>라는 시입니다. 2008년 문학세계사에서 출판한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라는 시집에서 처음 소개되었고, 2011년에 출판된 이어령 바이블 시학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에서도 수록되었습니다저명한 영문학자인 조신권 교수가 영어로 번역하기도 한 이 시에는 종교적 색채가 강하게 나타납니다예수님이 갈릴리 가나 지역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셨던 것을 상기시키기도 하지만 이어령 교수 자신이 2007년 신앙을 받아들여 기독교인으로 변한 것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에서 이어령 교수는 독자들에게 신앙을 고백할 것을 권합니다포도가 자라고 있는 포도원은 선택 받은 사람들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세계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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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26:29)”

 

이와 같이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이제 이 세상의 술은 그만 마시고부활해서 새 술을 마시겠다고 말씀합니다신앙이 없는 필자이지만 부활절을 맞이하여 이어령 교수의 시 <맹물이 포도주로 변할 때>를 한 번 읽어볼 것을 권합니다사실 이 시가 종교인임을 불문하고 가슴에 와 닿게 느껴지는 것은 이어령 교수를 신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든 배경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이어령 교수의 딸인 이민아 목사는 세 번의 결혼과 두 차례의 이혼첫 남편이었던 정치인 김한길과의 사이에서 낳은 큰 아들 유진의 갑작스런 죽음과 둘째 아들의 자폐 판정에 괴로워했고본인은 갑상선암 투병과 함께 실명위기를 겪었고 위암 투병 끝에 불과 53세의 나이로 2012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철저한 무신론자였던 이어령 교수가 기독교의 길로 들어선 것은 이민아 목사의 인도 과정에서 망막 박리로 이 목사가 실명 위기를 겪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라고 합니다이어령 교수는 죽음을 눈 앞에 둔 딸을 위해 차라리 사후가 없어도 되니 살아 있는 자들의 곁에 임하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2013년 3 <우먼센스>와의 인터뷰에서 이어령 교수는 간혹 책을 읽다가 모르는 게 생기면 대화하고 싶을 때가 가장 딸이 그립다고 말했습니다딸과 지적인 대화를 많이 하고딸이라기보다는 어떤 면에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대화가 가능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그 배경을 설명합니다인터뷰의 마지막에서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잠이 안 와서 책을 뒤적거리다가 놀라운 것을 발견하면 그 순간 행복해요계획한 것보다 우연하게노크 없이 주는 행복이 훨씬 커요.”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뒤적거리는 책 중에는 이어령 교수의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도 포함되어 있기를 바랍니다와인을 즐기는 사람이면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맹물이 포도주로 변할 때>뿐만 아니라 <포도밭에서 일할 때>라는 시도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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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박찬준 (Chan Jun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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