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영의 보르도 샤토 방문기(11)

2021.04.25 최고관리자
프랑스 0 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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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만화작가 ‘아기 타다시’의 작품 “신의 물방울”.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필독서가 된 듯하다. 필자는 “신의 물방울”이라는 만화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곳 보르도를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신의 물방울”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한국 와인 애호가에게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책이다. 방문객 중에는 만화책에 묘사된 문장 한 줄 한 줄, 인물의 성격 하나하나 그리고 “신의 물방울”에 소개되어 있는 와인의 이름을 거의 모두 기억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이는 필자에게 한마디씩 툭 던진다.
“샤토 샤스-스플린에 가보셨나요?”라고.
지금부터 ‘가난한 자의 라투르’, ‘신의 물방울의 수혜주’ 등의 수식어와 “슬픔이여 안녕” 이라는 짧은 문장으로 일약 스타 계열에 이름을 올린 샤토 샤스-스플린(Château Chasse-Spleen)으로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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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샤토 라투르를 방문해서 와인 한 잔 얻어 마시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필자가 뽀이약 지역을 갈 때는 나만의 길로 간다. 큰 도로는 속도를 내서 달리기는 좋지만 풍경을 맛보면서 이동하기에는 좋은 선택이 아니다. D1215 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Moulis 마을로 빠지는 길이 있다. 

샤토 샤스-스플린도 Moulis Appellation을 지키고 있다. 차가 많지 않은 한적한 도로라서 급한 볼 일(?)을 볼 때도 필자에겐 큰 은혜를 베푸는 길이기도 하다. Moulis 지역은 그랑 크뤼 샤토가 없어서인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지만, 마고 지역에서 10분도 되지 않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

골프가 잘 되는 날은 그린 위의 작은 구멍이 솥뚜껑만하게 보일 때가 있다. 자주 지나다니는 길이지만 언제나처럼 샤토 샤스-스플린은 아이스크림 디저트 먹고 사과 쳐다보듯 그냥 지나치기만 했는데 “Château Chasse-Spleen”이라는 조그만 이정표의 글씨가 그날 따라 필자의 눈에 크게 띄었다. 메독 지역이나, 생테밀리옹 지역의 샤토 이정표를 눈에 띄는 대로 방문하면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ㅎㅎ. 방문 예약은 못했지만 이정표가 가르키는 화살표 쪽으로 차동차 앞 바퀴의 방향을 돌렸다.

필자가 샤토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시 10분. 그렇게 숫자가 찍혔다. 머리 속으로 계산하기 시작했다. ‘지금이 1시 10분이니까 직원들 점심시간이 2시까지라고 한다면 나 혼자 밖에서 50분 정도는 멀건이 시간을 보내야 하네!,’하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작전을 세우기 위해서 샤토 전경을 싸~악 스캔을 하기 시작했다. 
샤토 직원이 기다림 없이 바로 투어를 해줄 수도 있으니깐 말이다. 그리고 발견한 사실 하나! 
샤토 사무실에서는 들어오는 방문객을 충분히 볼 수 있도록 넓은 유리 문을 여러개 해놓았기 때문에 굳이 필자가 사무실로 들어가지 않아도 직원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왔다. 필자가 먼저 사무실로 들어가서 샤토 직원들 점심시간을 방해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싶지 않은 배려(?)와 작전이었다. 
작전은 세웠으니 행동만 하면 된다.

일부러 사무실 근처에서 계속해서 사진을 찍고 있으니까 역시나 여직원이 사무실에서 슬그머니 나오더니 “어쩐 일이세요?”라고 묻는 것이었다. 걸려들었다!

“아, 네 오늘 샤토 방문 예약은 하지 않았는데 혹시 오후에 투어가 있으면 투어가 가능할까요?”라고 샤토 직원에게 물었다.
“지금은 점심시간이고 2시에 투어가 있으니까 대략 45분 정도 기다렸다가 그 때 투어를 하시죠!”라는 답변은 나의 불길한 예상을 조금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때부터 45분을 혼자서 잔디밭에도 앉아 있다가 뒹굴다가, 사진도 찍었다가 지웠다가, 신발도 신었다 벗었다, 차에 가서 물도 마셨다가......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2시가 가까워지자 샤토 정문에서 뿌연 먼지를 날리며 차 한대가 샤토로 들어오더니 세 명이 차에서 내려서는 사무실 쪽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잠시 후 2시 샤토 직원은 조금 전 사무실로 들어갔던 세 명과 함께 샤토 투어를 시작했다. 그런데 일행 세 명은 뭔가가 급해 보이는 듯한 움직임들이었다. 프랑스에서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조급함이었다. 

보통 투어를 하면 샤토 역사, 포도밭, 양조과정, 와인 숙성고, 와인 테이스팅 이런 순서가 일반적인데 세 명은 바로 와인 테이스팅을 하자는 것이었다. 샤토 직원은 필자에게 와인 테이스팅을 제일 먼저 해도 되냐고 묻는 것이었다.

“저야 전혀 상관없으니 세 분들 편리대로 하셔도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샤토 직원은 우리를 와인 테이스팅 룸이 있는 까브(Cave)로 안내했다. 첫 눈에 들어오는 까브는 마치 중국 공산당 구호를 잔뜩 적어 놓은 빨간색이 벽에 난잡하게 마구마구 그려져 있는듯해 보였다. 

‘도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벽에다 그것도 시뻘건 색으로…… 공사 중인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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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필자와 같이 투어를 시작했던 세 명은 다른 샤토의 예약이 있는 듯 보였다. 샤토 여직원은 세 명에게 한 번에 세 종류의 와인을 잔에 따라 주었다. 테이스팅 시간도 아마 5분이 안 지났을 것 같다. 세 명은 투어 ​비용을 지불하러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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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필자는 까브에서 일하고 있는 두 사람의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Racking 작업이 한참 진행 중이었다. 궁금해서 필자는 까브 직원에게 “바쁘세요?” 슬쩍 대화의 뚜껑을 따보았다.직원은 웃으면서 “괜찮아요.” 라고 대답을 하고는 다시 하던 일을 계속했다."저기요~~궁금한게 있는데, 도대체 저기 비루빡에다가 왜 빨간색을 잔뜩 칠했어요?”라고 묻자 까브 직원 분은 Racking 작업하던 호수를 멈추더니 “이쪽으로 와 보세요.” 하는 것이었다.

쫄래쫄래 직원을 따라가서 어느 한 지점에 서서 다시 벽을 보자 난잡하게 그려져 있던 빨간색은 공중에 떠있는 듯한 입체 삼각형의 모양으로 바뀌었다. 자리를 이동하면서 보니 피 튀기는 전쟁터 화면이 3D 예술품으로 바뀐 것이다. 쓰레기를 재활용해서 만든 스페인의 빌바오 박물관이 바로 떠올랐다. “야~~신기한데요.”하며 놀라는 필자의 표정에 까브 직원은 흐뭇해했다.

잠시 후 계산을 하러 갔던 여직원이 다시 까브로 돌아왔다. 돌아온 직원에게 필자는 “Racking 작업하는 것을 좀 계속 지켜봐도 될까요?” 라고 묻고는 까브 직원의 일하는 장면을 계속 카메라에 집어 넣었다. 직원과 필자가 다시 까브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 순간 눈에 띈 것은 한 쪽 구석에 있는 그랑 크뤼 샤토인 샤토 카망삭(Château Camensac) 와인이었다.

“왜 샤토 카망삭 와인이 저기 놓여져 있나요?”라고 묻자, “2005년에 현 샤토 샤스-스플린의 오너인 샐린 빌라르가 샤토 카망삭을 구입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샤토의 정원에는 안 볼래야 안보이지 않는 릴랑 부흐제(Lilian Bourgea)의 예술 작품인 3m 높이의 장화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다. 영업하는 사람들 괴롭힌다고 하이힐에 술마시게 하는 사람들을 저 장화에 넣어버리는 용으로 사용하면 될 듯하다. 이 밖에도 마사히데 오타니의 가스통이라는 주제의 조형물도 있었다. 그리고 꽃을 심어놓은 화단에는 코르크가 자갈을 연상시키는 장식으로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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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토 샤스-스플린의 다른 특징 하나는 화이트 와인도 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양을 생산하지는 않지만, 필자가 마신 2010년 빈티지는 세미용과 소비뇽 블랑을 6:4 정도 블랜딩해서 만든 와인이었다. 배향과 파이애플 껍질 그리고 스치는 오크 향, 무게가 미들급 정도는 되는 듯 깊은 인상을 주는 시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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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여 안녕”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겠지만, 필자는 샤토 샤스-스플린을 보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또한 바라보는 시각에 의해 난잡한 페인팅이 될 수도 있고,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으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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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정민영 (Min Yo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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