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은주의 와인 테이스팅] 03. ‘와인의 시각’ 평가, 두 번째 이야기(와인 미라클)
‘와인의 시각’ 평가, 두 번째 이야기(와인 미라클)
1976년 미국 캘리포니아 무명의 와이너리 ‘샤토 몬텔레나’. 한 사내가 와인들 사이에 누워 있다. 그리고 쉼 없이 떨리는 소리로 울고 있다. 그가 만든 화이트 와인이 병입 후 변색되어 버렸고 이제 이 와인들은 출시하기도 전에 다 폐기처분해야 할 상황이다. 잘나가던 중견변호사를 그만 두고 오로지 최고의 와인을 만들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던 짐은 은행 대출금을 갚지 못해 쩔쩔매면서도 비관하지 않았다. 모든 열정을 바쳐 만든 와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의 강한 자존심을 내려놔야 할 위기를 맞은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실제사건 ‘파리의 심판’을 다룬 영화 ‘와인 미라클’의 한 장면이다. 와인의 ‘변색현상’은 이 영화의 드라마틱한 중심 사건이 된다(이 영화의 원제가 ‘Bottle Shock’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해프닝의 결말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샤토 몬텔레나는 일시적 변색현상을 겪었던 것이며 이후 캘리포니아 최고 화이트 와인의 탄생을 알리게 된다.
비극적 운명을 타고난 와인의 산화
그렇다면 한 와인메이커의 인생을 좌지우지했던 ‘적변현상’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와인은 미생물의 변화와 온도, 공기유통속도, 상대습도 및 숙성상태 등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일반적으로 와인이 숙성되면서 색과 향 그리고 맛이 변하는 현상을 ‘산화작용’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산화에 대한 넓은 개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산화란 “와인이 산소를 흡수하는 현상뿐만 아니라 갈변효소의 산화작용”까지 포함된다. 산화작용은 알코올이 산소를 흡수하여 화학물질 알데히드가 생성되는 현상으로 나이가 들면서 맛과 향이 변질되는 결과를 낳는다. 반면 갈변효소의 산화는 갈변효소의 함량이 증가하여 갈색으로 변색이 되는 것이다. 앞서 얘기한 적변현상은 바로 갈변효소의 산화현상이다. 즉 와인을 병입하는 과정에서 공기유통속도가 빠를수록, 상대습도는 낮을수록 변색을 촉진할 수 있다. 다행히도 병입 후 서서히 병 안의 공기와 섞이게 되면서 산화갈변 효소의 함량은 낮아지고 본래의 색상으로 돌아오게 된다. 따라서 일시적인 현상으로 “pinking in the bottle”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대개는 산화작용과 효소산화 작용은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구별하기 어렵다. 샤토 몬텔레나 에피소드는 효소산화 작용이 독자적으로 일어난 보기 드문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기적을 경험할 때는 언젠가 반드시 온다
우리는 왜 와인 테이스팅을 할까? 단순하게 대답하면 자신의 즐거움을 드높이기 때문이다. 가격이 얼마이며, 어디 산(産)이며 또는 높은 평점의 와인이건 간에 그것이 무엇이든 와인을 마시며 더없이 행복한 쾌락을 누리는 것 이외의 다른 방법을 강요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하지만 그 즐거움과 행복을 안겨 주는 수단이 전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해당 분야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 물론 와인을 평가하는 기준이 즐거움이 되어야 하지만 이를 비교하고 표현하기 위해서는 습득한 지식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영화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적변현상을 일으킨 샤토 몬텔레나를 한참 들여다보고 시음을 마친 양조학 교수는 탄성을 내지른다. “맙소사, 책에서만 봤던 바로 그 현상이로군! 걱정할 것 없어. 시간이 필요할 뿐이야. 조만간 다시 제 색깔을 되찾게 될 거야!” 우리도 이 교수처럼 언젠가 기적적인 와인을 테이스팅할 그 순간을 위해 공부해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본다. ‘탄성’이 아닌 ‘탄식’을 내뱉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와인의 맑기(clarity), 보이는 그대로
와인의 투명도를 말한다. ‘Clear → Slightly Cloudy → Dull’까지의 단계로 평가하는데 맑고 윤이 나는 상태일 때 맑음(Clear)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강의를 하다 보면 간혹 탁함(Dull)과 진함(Deep)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하는 수강생들을 접한다. 와인의 맑기(clarity) 즉 투명도의 가장 중요한 핵심포인트는 침전물 또는 부유물의 존재 유무이다. 와인이 아무리 엷어도 부유물이 있다면 탁하다 말할 수 있으며, 진하더라도 이물질 없이 깨끗한 상태라면 맑은 와인이 되는 것이다.
와인의 투명도가 곧 와인의 품질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지난 글에서도 밝혔듯이 현대 와인 제조기술은 정제와 여과작업을 많이 해서 와인을 너무 맑게 만들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여과를 가볍게 한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지나친 여과는 와인에 풍미를 가미할 성분까지 모두 잃게된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마지막으로 와인의 기포이다. 스틸 와인인데도 기포가 보이면서 입안에서도 가벼운 탄산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전통적인 테이스팅 방식에서는 후발효가 짐작되는 불길한 징조 즉 투명도에서 결점 있는 와인이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와인의 균형감을 위해 일부러 미량의 탄산을 추가해서 생긴 기포일 가능성이 많다. 양조기술이 발달한 요즘 병 안에서 후발효가 일어날 일은 거의 없다. 따라서 여러분이 발견하게 될 기포는 정상적인 ‘Clear’ 평가를 내려도 된다.
다음 편에서는 와인의 밝기와 진하기 그리고 색상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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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백은주 (Eunjoo Baik)
(경희대학교 관광대학원 와인, 워터, 티 소믈리에 전문가 과정 교수 / 부산가톨릭대학교 와인 소믈리에 전문가 과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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