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은주의 와인 테이스팅] 04. ‘와인의 시각’ 평가, 세 번째 (먼저 통념을 깨라)
먼저 통념을 깨라
/‘와인의 시각’ 평가, 세 번째 이야기/
보르도 우안에서 코트 드 프랑 지역은 쌩테밀리옹이나 포므롤에 비해 유명한 산지는 아니다. 이곳 변두리에 독특한 와이너리가 있다. 400년 전통 그대로 포도를 가꾸고 와인을 양조해서 옛날 와인 맛을 고수해온 샤토 르 퓌(Chateau Le Puy)이다. 언젠가 이 와인을 테이스팅할 기회가 있었다. 옛 보르도 와인은 어땠을까 궁금했던 만큼 기대가 됐다. 그리고 지금까지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건 색상이 가볍고 탄닌이 부드러웠다는 것이다. 특히 잔에 따랐을 때 예상치 못한 비쥬얼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내가 아는 보르도 와인이 아니었다. 여느 보르도 와인과 달리 외관이 너무 맑고 엷은 루비 빛을 띄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짙은 색상과 강한 탄닌이 보르도 와인의 정체성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익숙함이 언젠가는 익숙하지 않게 되고 스타일 또한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와인스타일은 쭉 변화해왔다. 그게 바로 와인에 대한 통념을 깨야 하는 이유다.
알코올처럼 투명하고 눈물처럼 희미한 와인
와인을 마실 때 우선 본다는 것은 중요하다. 무엇이든 보아야만 감상할 수 있고 실체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다는 것은 마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와인의 외관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성질의 실체가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와인에 따라 외관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와인마다 태어난 곳이 다르며 포도품종과 만든 방식이 제 각각이니 그에 따라 색깔도 다르고 농도도 달라진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바로 소비자의 취향이다. 시대가 변하면 취향이 달라지고 취향이 달라지면 와인이 달라진다. 중세시대에는 맑고 투명한 와인을 선호했다. 옛 문헌들을 살펴보면 화이트는 암반수나 알코올처럼 투명해야 했으며 레드 와인은 눈물처럼 희미한 붉은 색(clairet)이었다.
더 진하게 진하게
시간은 흐르고 소비자들의 취향도 변했다. 뉴월드 와인산지의 성장은 그 변화를 부추겼다. 따뜻한 기후에서 와인을 만들면서 진한 빛깔과 강렬한 향으로 소비자들을 유혹했다. 그러자 유럽에서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맷 크레이머는 <와인력>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보르도는 공식적으로는 오랫동안 수행해온 전통적인 관습을 고수하는 듯했지만 조용히 양조방식을 쇄신하였고, 그 결과 20년 전에 비해 색깔이 훨씬 진하고 풍미가 진하며 과일 맛이 더욱 강한 와인을 생산하게 되었다.” 진공 농축기나 삼투압기를 사용하면 손쉽게 진한 와인을 만들 수 있었다. 초기에는 날씨가 안 좋았던 해에만 사용하던 것이 나중에는 날씨가 좋았던 해마저 사용하게 되었다. 한편에서는 지나친 과용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진한 색상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다. 생산자도 소비자도… 그래서 요즘에는 뉴월드, 유럽 할 것 없이 진한 와인이 대세다.
농도 구별하기
그럼 본격적으로 와인의 외관가운데 농도(Intensity)에 대해 알아보자. 와인의 진하기 즉 농도는 색깔의 옅고 진함을 의미한다. ‘Pale(Light) → Medium- → Medium → Medium+ → Deep(High)’의 단계로 나뉘는데 와인 잔을 기울여보면 쉽게 구별할 수 있다. 레드 와인은 손바닥에 잔을 기울여 손금이 훤하게 보이면 연한(Pale) 와인이며, 아예 보이지 않는다면 진한 와인이다(Deep). 화이트 와인은 조금 까다롭다. 화인트 와인 잔을 기울이면 물처럼 투명한 테두리가 보이는데, 이를 워터림(water rim)이라 한다. 워터림이 넓게 퍼져 있을수록 연한 와인이며 워터림이 거의 안 보인다면 진한 와인이라고 볼 수 있다.
농도는 곧 와인의 모든 것
와인의 농도는 포도품종, 포도의 수확시기, 산지, 제조방법, 숙성기간, 와인이 생산된 지역의 기후와 빈티지 등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원인으로 포도 품종을 꼽을 수 있다. 즉 피노 누아는 연한 루비색이고 말벡은 진한 자주색이다. 또한 양조방식을 예로 들면 같은 샤르도네 품종일지라도 오크통을 사용하지 않으면 연한 노란색에 녹색의 색조가 엷게 가미된 색깔을 띤다. 하지만 오크통에 숙성한 샤르도네는 진하고 강렬한 노란색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품질을 말하지 못하는 농도의 질
과거 와인이 엷다면 어린 포도나무, 덜 익은 포도 수확, 비가 많이 온 해의 수확연도가 원인이 되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반대로 색상이 진하다면 잘 익은 포도를 사용하여 장기숙성이 가능한 탁월한 품질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현대 와인 양조에서는 진공농축기나 삼투압기를 사용하여 색의 농도는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농도가 곧 품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변화가 심한 환경에 자란 야생초는 약효가 뛰어나다고 한다. 변화에 단련하면서 자라기 때문에 먹기도 좋고 맛도 있다는 것이다. 환경은 변화하고 사람들의 입맛도 때에 따라 변한다. 또 변화해가는 입맛에 맞춰 와인이 바뀌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와인은 변모되어 가며 테이스팅은 변화해야 한다. 맑고 연한 와인이 주류를 이루는 때가 다시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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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백은주 (Eunjoo Baik)
(경희대학교 관광대학원 와인, 워터, 티 소믈리에 전문가 과정 교수 / 부산가톨릭대학교 와인 소믈리에 전문가 과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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