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은주의 와인 테이스팅] 05. 누구나 맡지만 아무나 맡을 수 없는 그것, Aromas
누구나 맡지만 아무나 맡을 수 없는 그것, Aromas
Le vinfut inventé pour donner aux homes la memoire des paradis perdus.
와인은 인간에게 잃어버린 파라다이스의 기억을 되돌려주기 위해 발명되었다.
“과자 부스러기가 섞여 있는 한 모금의 차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고 소스라쳤다. (중략) 그 순간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이 맛, 그것은 콩브레 시절의 주일 아침 (그날은 언제나 미사 시간 전에 외출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내가 레오니 고모 방으로 아침 인사를 하러 가면 고모가 곧잘 홍차나 보리수꽃을 달인 물에 담근 뒤 내게 주던 그 조그만 마들렌의 맛이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 향기에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려낸다. 추억을 소환하기에 가장 강력한 장치는 냄새인 것 같다. 그래서 향기의 힘은 강하다. 보고, 맡고, 만지고, 맛보고 등 인간이 느끼는 감각 가운데 가장 자극적인 효과를 주기 때문이다. 와인의 아로마를 맡는 것 또한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어린 시절 추억 속에 잠들어 있던 향들을 깨운 뒤 얇고 투명한 와인 잔 안에 불러모으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어린 시절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며 라일락 짙은 냄새, 국화∙수선화∙소나무의 향기, 봄의 흙냄새, 가을의 젖은 낙엽냄새 그리고 사과∙자두∙호두∙꿀 냄새를 즐겨 맡았다면 와인은 당신과 추억을 이야기하는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그러나 딱딱한 아파트에서 자라나고 자연과 추억을 쌓지 못한 채 성장했다면 와인은 그저 무뚝뚝하고 인색한 친구처럼 느껴질 것이다. 와인의 향을 맡는 걸 어려워하는 이들이 많은 이유 또한 요즘 우리들이 자연에 대한 추억이 많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와인의 몽타쥬
사실 우리가 흔히 맛이라 표현하는 정체는 향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향기를 맡을 수 없다면 아무리 맛있는 고기도 그저 고무를 저작하는 맛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와인의 향은 와인의 맛을 규정하거나 스타일, 품질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한잔의 와인이 탄생하려면 무수한 변화와 작업들이 필요하다. 와인은 땅이 주는 공급물과 화학적∙생물학적 신비 그리고 인간의 예술을 통해 구조화된 것이다. 땅을 표현하고 화학물들이 결합하며 인간의 손길을 거치는 동안 와인은 달라진다. 이런 와인속의 스타일, 세밀함, 영감을 모두 모아 놓은 것이 바로 와인의 향이다. 어디에서 나고 자랐는지, 만드는 동안 무엇을 넣고 또 뺐는지, 서빙할 때의 온도는 어떠했는지 이 모든 정보를 와인은 향을 통해 알려준다. 마치 몽타주와 같다. 소설 속에서 여러 상징들을 제시받으며 상황에 대해 입체적으로 접근이 가능하고 감성과 리얼리티를 살리는 것처럼 우리는 와인의 향을 맡으면서 입체적으로 음미하고 맛의 감동을 배로 살려주는 것이다. 이처럼 와인의 향을 빼고 와인을 이야기할 수 없듯이 와인 테이스팅을 잘하고 싶다면 먼저 와인의 향을 맡을 수 있어야 한다. 와인 테이스팅이 100이라면 80은 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와인의 코(Nez du vin)
그렇다면 아로마 또는 ‘와인의 코(Nez du vin)’라 표현하는 와인의 향은 무엇일까? 와인의 향은 화학분자의 결정체로서 이 화학성분들이 서로 섞여있는 혼합물의 결과가 바로 와인의 향이다. 화학적으로 풀어보자면 소비뇽 블랑의 피망향은 메톡시피라진(methoxypyrazine) 성분이다. 결국 피망향이 난다고 느끼는 건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며 사실 피망 성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뮈스카데 품종을 예로 들면 아래와 같이 우리가 맡는 향, 실제 화학성분 그리고 영향을 주는 요소들로 구분해볼 수 있다.
출처: [la Degustation] journal international des sciences de la Vigne et du Vin
위 표에 나온 성분 외에도 오크통, 리(lees) 사용여부, 젖산발효에 따라서 새로운 향이 추가될 수 있다. 이처럼 와인의 향과 관련된 성분은 500~800여 종류나 된다고 한다. 이 가운데 한가지 향, 예를 들어 카시스향, 파란 피망향만으로 요약되는 와인은 좋은 와인이라고 볼 수 없으며 복잡한 요소가 드러날 때 좋은 와인이다. 따라서 좋은 와인을 감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향들을 맡을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 또한 더욱 중요한 것은, 위 뮈스카데를 예로 든다면, 와인의 향을 맡았을 때 고수나 송진향이 지배적이라면 날씨가 서늘한 지역이거나 수확 적기보다 앞서 수확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반대로 장미나 밀납향이 난다면 날씨가 따뜻하거나 늦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꽃, 과일향이 절제된 와인이라면 지나친 정제작업의 결과일 것이다. 이처럼 어떤 향이 나느냐 그 정체에 따라서 우리는 마치 추억을 더듬듯 그 와인이 걸어온 길을 추적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맡지만 아무나 맡을 수 없는 아로마
오늘날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기술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의 후각과 경쟁할만한 기계는 없다. 우리는 와인에서 감지되는 후각적 느낌을 자연에서 느낄 수 있는 향 가운데 가장 유사한 향으로 표현해야 한다. 와인마다 어떤 리듬을 가지고 있는지 다양한 와인을 마시며 주의깊게 살펴보라. 마치 의사가 내시경으로 몸의 안 보이는 것을 들여다보듯이 와인 속의 스타일, 세밀함, 영감을 관찰하고 그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라. 누구나 훈련을 쌓고 연습을 하면 익힐 수 있다.
WRITTEN BY 백은주 (Eunjoo Baik)
(경희대학교 관광대학원 와인, 워터, 티 소믈리에 전문가 과정 교수 / 부산가톨릭대학교 와인 소믈리에 전문가 과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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