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철 회장의 와인칼럼] 01. 와인과 김치

2021.04.17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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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과 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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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와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와인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많지만, “와인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간단하게 이야기해 줄 수 없을 만큼 와인은 다양하고 복잡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와인의 종류도 너무 많아 무엇이 어떤 것인지 가닥이 잡히지 않는데, 짧은 시간에 서양의 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와인은 우리나라 고유의 술도 아니고 우리가 자주 마시던 술도 아닌 전혀 다른 풍토와 문화적 배경을 가진 서양의 대표적인 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그 맛과 멋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차라리 마음이 편할 것 같다. 
그렇지만 와인을 우리의 된장이나 김치처럼 옛날부터 서양 사람의 식탁을 차지한 하나의 발효식품이라고 생각한다면,
수천 년 간 찬란한 발효문화를 가꾸어 온 우리나라 사람은 약간만 입장을 바꾸어 생각한다면 오히려 더 쉽게 와인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와인이나 김치 모두 발효식품
와인도 발효식품으로 된장, 간장, 김치, 젓갈 등 우리나라 발효식품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발효식품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먼저 발효식품은 미생물의 대사 작용을 거쳤기 때문에 복잡한 물질이 간단한 물질로 분해되어 우리 몸에서 소화, 흡수가 빠른 영양식품이란 점이다. 두 번째는 위생적이라는 점이다. 발효란 수많은 미생물 중에서 우리가 원하는 미생물만 살아서 우리가 바라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병원균을 포함한 다른 미생물이 자랄 수가 없다. 옛날에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물이나 음식물을 잘못 먹어 쉽게 탈이 나는 경우가 많았지만, 발효식품만은 장기간 보관해 가면서 맛을 볼 수 있었고, 그 고유의 맛이 변하지 않는 한 항상 안전한 식품이었다. 세 번째 특징으로서 발효식품의 맛은 그 맛을 아는 사람만이 즐길 수 있는 독특한 감칠맛을 지니고 있으며, 한 번 그 맛을 알면 그것을 먹지 않고는 못 배기는 마약과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와인도 이러한 발효식품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맛을 아는 사람만이 즐길 수 있는 식품이다.
 
와인을 배운다는 것보다 외국인이 김치를 배운다고 생각해 보자
입장을 바꿔서 김치의 맛을 배워 보려고 노력하는 서양 사람에게 김치의 맛을 보여주면서 김치의 깊은 맛을 알려주려고 한다고 가정해 보자. 김치 맛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작년 김장 때 담근 묵은 김치의 맛이 최고라면서 맛을 보라고 주면 묵은 내 때문에 거부감을 더 가질 것이다. 먼저 맵지 않은 동치미 국물의 맛을 보여주면서 거기 있는 무나 배추의 사근사근한 맛을 익히고, 차츰 익숙해지면 여러 종류의 붉은 색 김치를 맛보게 한 다음, 오래 묵은 김장김치의 맛을 과연 느끼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별도로 깍두기의 맛도 보이고, 파김치, 갓김치, 고들빼기와 같은 특별한 김치의 맛도 알게 해 주는 게 좋다. 와인도 마찬가지이다.

초보자에게 오래 묵은 값비싼 와인을 따라 주면서 그 깊은 맛을 느껴보라고 해야 소용없는 일이다. 먼저 신선하고 가벼운 화이트와인의 맛을 보여주면서 그 색깔과 향 그리고 맛을 느끼게 하고, 그것을 즐길 수 있는 단계를 지난 다음에 가벼운 레드 와인을 권하는 게 좋다. 그러면서 육류요리와 레드 와인의 떫고 씁쓸한 맛과 조화를 즐길 줄 알고, 더 발전하면 오래된 고급 레드 와인의 깊은 맛을 좋아하지는 못할망정 "아하 이런 맛을 그들은 좋아하는구나."하고 그 맛을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셰리나 포트, 샴페인과 같은 특수한 와인의 맛을 별도로 음미해 보는 것이 좋다.
 
김치보다 더 많은 종류의 와인
우리나라 김치의 종류는 많기도 하지만, 지방마다 그 특색이 있고 또 집안마다 그 솜씨가 다른 만큼 그 종류를 헤아리기도 어렵거니와 그 맛을 다 알 수도 없는 일이다. 대개 서울 김치는 담백하고, 전라도 김치는 짜고 맛이 진하다는 식으로 지방별 특성을 이해하는 정도면 우리나라 김치의 맛을 안다고 할 수 있다. 와인도 포도의 품종이 수없이 많고, 각 나라나 지방에 따라 맛이 다르고 또 해마다 그 맛이 변하기 때문에 역시 그 종류를 다 알 수는 없는 일이다. 가끔 전설 같은 이야기로 유명한 와인 전문가는 어떤 와인의 맛을 보면 “어느 지방에서 무슨 포도로 어느 해 담은 것이다.”라고 족집게 같이 집어낸다는 이야기가 들리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대개 전문가라고 해봐야 어느 특정지역에 국한되어 그 지방의 와인에 대해서 잘 안다든지, 어느 지방의 빈티지를 기억하고 그 맛을 기억하는 정도이지, 일 년에 한 번씩 생산되는 수많은 종류의 와인을 죽을 때까지 하루에 수십 병씩 맛을 봐도 세계적으로 생산되는 와인의 맛을 다 볼 수는 없다. 그러니까 대개 유명한 생산지의 와인의 특성을 파악하는 선에서 만족하면 된다.
 
오래된 와인과 김치
이렇게 김치와 비교해서 와인을 생각한다면 오래된 와인이란 것도 어떤 것인지 바로 이해되리라 생각된다. 우리는 일 년 내내 김치를 먹지만 김장은 일 년에 한 번하면서 다른 때 김치 담글 때보다는 훨씬 더 정성스럽게 담는다. 즉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 짜고 진하게 담그고 겨울에 먹을 것과 봄에 먹을 것 그리고 여름까지 먹을 것을 따로 따로 만들어 온도가 일정한 땅속에 저장한다. 와인도 마찬가지로 오랜 시간 숙성시켜 깊은 맛을 내는 와인은 담글 때부터 보통 와인과 다르게 취급된다. 먼저 장기간 숙성에 적합한 품종을 선택하고, 레드 와인의 경우 껍질과 함께 침지시키는 시간을 길게 하여 껍질과 씨에서 우러나오는 타닌 성분을 증가시키고 아울러 색소도 많이 추출되도록 배려한다. 그래야 오래 두어도 맛이나 향이 변질되지 않고 오히려 더 나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바로 소비되는 값싼 와인은 오래 두면 맛이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 있지 않아 맛이 변하게 된다. 즉 겉절이를 아무리 오래 두어도 묵은 김치가 될 수 없는 원리나 마찬가지이다.
 
숙성, 익어야 맛있다
김치는 익어야 맛이 난다. 어느 정도 숙성기간을 거치면 고추의 매운맛이 부드러워지고 젓갈도 분해되면서 여러 가지 성분과 조화되어 특유의 맛이 생긴다. 그렇지만 꼭 익힌 김치만 맛있는 것은 아니다. 생김치나 겉절이도 그대로의 맛이 있다. 와인도 어느 정도 숙성기간을 거쳐야 이스트 냄새가 사라지고 떫은 맛도 부드러워지면서 제 맛이 나지만, 생김치나 겉절이와 같이 와인도 그 해 담가서 그 해가 가기 전에 소비하는 보졸레(Beaujolais)와 같은 타입이 있다. 우리가 겉절이를 만들 때는 부드러운 배추 속잎을 사용하고 젓갈을 넣지 않거나 넣어도 약간만 넣고 깨도 듬뿍 뿌려서 배추의 생생한 맛과 양념 맛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듯이, 보졸레도 특별한 품종을 선택하여 다른 와인과는 다르게 탄산가스가 가득 찬 탱크에 포도를 통 채로 넣어서 발효시키는 특이한 방법을 사용한다. 생김치를 좋아하는 사람, 적당히 익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 시큼한 김치를 즐기는 사람 그리고 묵은내를 최고로 치는 사람이 있듯이, 와인도 마시다 보면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타입이 따로 있기 마련이다. 그러면서 때에 따라 변하는 자기 입맛에 맞추어 와인을 선택하는 것이 식도락의 즐거움이 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와인에 대해 잘 이해가 되지 않으면 김치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올 수 있다. 숙성이나 저장 등의 예를 들면, 김치는 어느 정도 숙성기간이 필요하지만 이 기간이 너무 길어도 좋지 않다. 자기 입맛에 가장 적합하다고 느낄 때 꺼내서 먹는다. 와인도 어느 정도 숙성을 시키다가 최상의 품질을 갖출 때 병에 담아 내놓는다. 와인이나 김치 모두 식품으로서 그 수명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와인을 마시는 것은 서양 문화를 맛보는 것
김치는 수천 년 간 조상 대대로 우리 입맛에 길들여 온 것이다. 이 오묘한 맛을 어찌 외국 사람이 짧은 시간에 제대로 감지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와인을 대하는 우리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외국 사람이 김치의 맛을 알기까지는 쌀밥이나 된장국 맛도 알아야 하고, 젓가락도 사용할 줄 알아야 함은 물론, 우리 역사나 문화까지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하듯이, 우리가 와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서양 요리는 물론 그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도 따라야 한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와인이 보편적인 술로서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하지만, 서양의 문화가 계속 유입되면서 식생활 습관이나 음주 습관이 변해가면서 그 수요 또한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국제교류가 빈번한 이 시대에 외국인 특히 유럽인을 상대하려면 와인에 대한 이해도 깊어야 한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술이란 그 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의 문화적 수준이 주변의 다른 곳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미 우리의 의, 식, 주생활 깊숙이 침투한 서구문화의 바탕 위에서 와인이 침투할 무대는 갖추어졌다고 봐도 된다. 와인과 김치는 둘 다 문화적 전통이 깊고 특이한 맛을 가지고 있어서 와인과 김치가 어울리는 일은 없겠지만, 와인을 배우려면 외국인이 김치를 배운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그 이해가 빠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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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김준철
(한국와인협회 회장, 김준철와인스쿨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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