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태의 와인에세이] 와인의 기억
<와인의 기억>
태풍이 올라 오면서 장마전선이 북상해서 그런가, 드디어 한여름 후덥지근한 날씨를 느끼게 하는 오후이다. 테이스팅을 핑계로 가볍게 마신 와인이 나른함을 더하게 하고 꿈결처럼 흐르는 단상들이 바람처럼 스쳐진다. 와인을 처음 접한 것은 날카로운 첫 키스의 기억과 함께 머문 P 브랜드의 딸기주였다. 엄밀히 말하면 포도로 만든 와인이 아니고 과실주였다. 그것도 아주 달콤한 품질 미상의 과실주였을 것이다. 그래도 그 와인의 추억은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서 떠나지 않고 머물러있다.
그리고 몇 년 후 나는 낯설고 유혹적인 도시 한가운데서 다시 와인을 만났다. 그때만 해도 뉴욕은 아주 먼 곳이었다. 가난한 나라 국적의 주재원으로 가게 된 그곳은 빅애플이라는 별명을 가진 전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였다. 세상의 모든 것이 존재하고 가능한 곳? 아름다움의 극치는 지옥과 천국이 만나는 변곡점이라는 탐미적 가치를 깨닫게 해준 곳이다. 그곳에서 나는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비 오는 가을날 어스름 퇴근길에는 2번가(2nd Avenue) 미드타운에 있는 오픈바 스탠드에 앉아 코냑 잔을 기울일 수 있었고, 무더운 여름날과 서늘한 초겨울 마시는 맥주의 선택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은 서울의 저녁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당시에는 너무나 다른 세상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과 적응에 분주하던 시간이 지나던 어느 날 뉴욕의 긴 겨울 밤이 익숙해질 무렵, 떠나온 서울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보고 싶고 가족들의 얼굴이 진한 마음속 잔상으로 나타났고, 누군가가 보내준 해바라기 노래가 외로움과 엉키면서 영혼의 울림으로 들렸다. 위스키 병은 쉽게 바닥이 보였고, 다음날 아침은 숙취와 허탈함 속에서 맨하튼으로 향하는 출근길에 허드슨 강을 따라 흐르는 칼바람을 맞아야 했다. 위스키를 혼자 마시는 저녁마다 친구들이 보고 싶었고, 친근했던 술 한잔이 알코올이라는 악마의 유혹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허전하던 주말 집 근처 리쿼 샵에서 또 다른 마실 거리로 와인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가난한 나라의 젊은 주재원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가격이 저렴한 와인으로는 보통 이태리 키안티(Chianti)이거나 프랑스 론 지방의 ‘코트 뒤 론’ (Côtes du Rhône)이 주로 눈에 띄었던 것 같다. 지금 기억해 보면 보통 5~7불 정도였는데 세일하는 경우 4불 이하로도 살 수 있었다.
키안티는 보통 산도가 강해서 파스타와 먹기에는 좋았지만, 혼자 저녁때 음식 없이 먹기엔 너무 시고 강해서, 나는 주로 론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요즈음은 키안띠 와인도 전통적인 방식에서 많이 탈피하고 모던한 스타일로 양조해서 예전과 같이 강한 신맛이나 덜 정화된 발효 향을 느끼긴 어려운 것 같다. 물론 ‘코트 뒤 론’ 와인의 특유한 식물성 허브 향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지만 대안이 많지 않았기에 무던히도 많이 마셨던 것 같다.
점점 와인이 익숙해져 갈 때 누구나 경험하듯이 점점 다른 와인들, 특히 좀더 좋은 와인을 탐닉하게 되고 그 선택과 맛의 지평을 넓히기 시작했다. 병당 4불짜리 와인을 마실 때와 20불 넘는 와인을 마시는 것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그렇지만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서 다시 4~5불짜리 와인으로 내려왔고, 이 오르락 내리락 선택의 고통은 한동안 계속 되었던 것 같았다. 지금도 ‘코트 뒤 론’ 와인을 보면 그때 생각이 나면서 기억 속의 독특한 향이 코끝을 스치는 착각에 빠진다. 이 오래된 인연이 끈질기게 이어져 오다 드디어 꽃이 핀 느낌이다. 온통 와인으로 둘러싸인 요즈음 내 현실이 이 먼 곳에 남겨졌던 기억 속의 불씨로 점화된 모양이다.
오랜 시간 와인을 마시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자주 묻는 질문이 있다. “어떤 와인이 맛있나요?”, “어떤 와인이 좋은가요?” 정답은 아주 쉽다. 좋은 사람과 마시는 와인이 맛나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신다면 그 와인이 무엇이든 상관없지 싶다. 그리고 내가 마시는 이순간의 와인이 최고의 맛일 것이다. 사랑도 친구도 내 안에 있어야 소중하다고나 할까? 내가 마실 수 있는 와인이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건 시간과는 관계없는,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마음과 같은 것이라고 마구 떠들어 대고 싶다. 무더운 공기가 턱밑으로 올라오는 나른한 오후 날카로운 옛사랑의 첫 키스 같은 독일 리슬링 와인이 생각나는 건, 어쩌면 내 안의 도펠갱어가 시키는 유혹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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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WS통상 대표님 조원태(Wayne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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