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보내며
한 해를 보내며
그리스의 문학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가 쓴 『스페인 기행』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난 낡은 가치를 무시하고 새로운 가치를 찾아가는 젊은 세대를 보면 행복감을 느낀다. 난 행복하다. 왜냐하면 진보적인 삶이 내 젊은 시절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또 다른 젊은이에게 옮겨 갔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난 이런 빠른 리듬을 좋아한다. 난 감지할 수 없을 만큼 안정적인 움직임은 참을 수 없다. 죽기 전에, 나의 인생이 가능한 한 많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다. 그래서 나보다 젊은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사람들이 젊은 시절에 사랑했던 것들을 비웃고 야유하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로 큰 기쁨이다. 인생이 나를 버리고 떠나려 하고, 더 이상 나를 돌봐 주지 않으며, 젊은 사람을 향해 도약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매혹되는 것을 느낀다는 것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다. 난 화나지 않았기 때문에, 패배하지도 않았고 뒤처지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 젊은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지도 않는다. 대신 난 그들과 함께 비웃과 비아냥거린다.”
국내에서는 영문판이 2008년에 처음 번역, 소개되었지만 카잔차키스가 이 책을 그리스어로 처음 발표한 것은 1937년의 일이고 1963년에 처음으로 영문판이 등장했었다. 그가 1883년에 출생한 것을 감안하면 50대 중반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지난 10년 동안 중에서 나는 금년에 가장 많은 책을 읽었다. 와인에 대한 책은 별로 없고 대부분 문학작품이거나 여행과 관련된 책 혹은 교양서적들이다. 카잔차키스가 『스페인 기행』을 쓴 나이와 비슷한 나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를 웃으며 읽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젊음의 여러 순간들을 회상하며 읽었다. 아무리 내가 문학가가 아니라고 해도 얼마나 한심하고 창피한 일인가? 그렇지만 젊어서 읽었던 그런 책들을 다시 읽는 것은 내게 큰 즐거움이자 새로운 배움이었다. 인생이 나를 찾아온 시간보다 버리고 떠나려 할 때가 더 짧은 나는 카잔차키스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젊음과 대화하고 새로운 가치를 찾아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니 말이다. 어떤 새로운 가치? 젊었기 때문에 혹은 당시의 무관심 때문에 보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가치. 이러한 것들이 내 남은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가치’라고 말하고 싶고, ‘어떤 가치인가?’라는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자.
“죽기 전에, 나의 인생이 가능한 한 많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다.”고 카잔차키스가 말한 것에 나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는 예를 들어 카르멘과 돈키호테가 젊은 세대에 의해 이전과 다르게 해석되는 것을 경험했는데, 이는 여행을 통해 감지한 움직임이었다. 그 여행하는 방식은 나와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가 가진 촉수와 관심이 내가 가진 촉수와 관심과 다르니까. 그는 젊은 사람들과의 대화를 찾았고, 나는 어떤 목적에 의해 보고 싶은 것들을 찾아 다녔다. 그 중의 일부가 젊었을 때 읽었던 혹은 젊었을 때 읽어야 했던 책들이다. 카잔차키스와는 달리 나는 과거에로의 여행을 많이 한 셈이다. 금년에 나는 많은 해외출장을 다녀왔다. 1년의 1/3 이상을 해외에서 보냈다. 와인박람회도 방문했었고, 국제와인품평회에도 참가했고, 와이너리 투어도 했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관광을 하는 것에도 큰 관심이 있었다. 9월에 뮌헨에서 열린 한 박람회에 연사로 초대받아 받은 인건비는 괴테, 헤세, 모차르트의 발자취를 따라가느라, 또한 평소에 가고 싶었던 미술관들을 방문하느라 모두 날렸다. 그래도 좋았다. 바이마르에서 괴테의 관을 2m 가까이에서 보았을 때 가졌던 감동은 내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와인과 예술’ 혹은 ‘와인 인문학’ 강의 때 자주 인용하는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을 베를린에서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무슨 대단한 지성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그냥 중년이 되면서 새로 가지게 된 촉수를 만족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금년에 받았던 가장 큰 감동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경험했다. 티에리 타옹(Thierry Tahon)이라는 프랑스의 철학자가 와인을 우연히 처음 접하고 와인의 세계에 빠져 들면서 그 동안의 삶이 얼마나 불안정했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경험이라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지난 3월 마드리드에 갔을 때 스페인 친구의 도움으로 레알 마드리드(Real Madrid)의 축구 경기를 보게 되었다. 마드리드의 차마르틴 구에 있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경기장. 1947년에 완공되고 몇 번의 공사를 거쳐 현재 81,000석 정도를 갖춘 이 경기장에서 세계적인 스타 호날두는 2골을 넣으며 지네딘 지단 감독이 이끄는 레알 마드리드를 스페인 라리가의 1위로 등극시켰다. 약 70,000여명의 관중이 관람한 이 경기에서 지네딘 지단과 호날두를 본 것보다도, 역사적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경기장에 있었다는 사실보다도 나를 더 감동시킨 것은 플라시도 도밍고의 목소리로 울려 퍼지는 레알 마드리드의 응원가 “Hala Madrid y Nada Más(파이팅 마드리드, 그 외엔 아무것도 없다)”였다. 모든 레알 마드리드의 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 노래를 함께 부르는 것을 눈과 귀로 경험한 것은 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 금년 최고의 감동이었다. 축구 응원가 같지 않은 어딘가 가슴 뭉클하게 하는 멜로디, 동서양 사람들과 남녀노소가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멜로디, 간결한 가사! 나중에 알게 된 이 응원가의 가사는 그날의 감동을 더욱 격하게 만든다.
“그대가 만든 역사
그리고 앞으로도 만들어낼 역사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죠.
그대의 승리에 대한 열렬함 때문에
별들이 나온다!
나의 오래된 차마르틴
멀리에서도 가까이에서도
우리를 이곳에 모이게 한다.
난 그대의 옷을 입습니다.
가까이 바로 제 심장 근처에
그대가 뛰는 날들이
제 전부입니다!
화실이 뛴다.
나의 마드리드가 공격한다.
나는 투쟁이다. 나는 아름다움이다.
내가 배운 함성
마드리드 마드리드 마드리드
파이팅 마드리드
그 외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파이팅 마드리드.
그대가 만든 역사
그리고 앞으로도 만들어낼 역사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죠.
그대의 승리에 대한 열렬함 때문에
별들이 나온다!
나의 오래된 차마르틴
멀리에서도 가까이에서도
우리를 이곳에 모이게 한다.
마드리드 마드리드 마드리드
파이팅 마드리드
그 외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파이팅 마드리드.
마드리드 마드리드 마드리드
파이팅 마드리드
그 외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파이팅 마드리드.”
얼마나 멋진 가사인가? 특히 “나의 오래된 차마르틴 / 멀리에서도 가까이에서도 / 우리를 이곳에 모이게 한다”와 “나는 투쟁이다. / 나는 아름다움이다.”라는 가사는 너무나 멋지다. 그들에게 차마르틴이 있다면 금년에 내게는 와인이 있었다. 금년에 다른 때에 비해서 많은 책을 읽은 것도, 많은 해외출장을 간 것도, 감동의 순간들을 많이 경험한 것도 와인이 맺어준 인연 때문이다. 어떤 인연은 내가 스스로 찾은 것이고 어떤 인연은 자연스럽게 찾아온 인연들이다. 거기에는 늘 와인이 매개체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와인과 함께 한 금년에 감사하고 있다. 와인과 함께 하는 인생에서 내게 가장 큰 즐거움을 주는 것은 와인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가장 큰 매력인 감각적 즐거움과 다양성이 아니고, 와인이 매개가 된 감동과 경험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금년에 배운 가장 큰 울림이다.
내년부터는 내가 배운 울림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 하나의 바이러스가 되고 싶다. “난 화나지 않았기 때문에, 패배하지도 않았고 뒤처지지도 않았다.”라고 말한 카잔차키스처럼 언젠가는 자신감도 가지면서……
WRITTEN BY 박찬준 (Chan Jun Park)
Wine Writer / Consultant / Leturer
Asia Director of Asia Wine Tr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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