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은 회상이다
와인은 회상이다
와인 전문가인 마이클 슈스터(Michael Schuster)는 『와인 테이스팅의 이해』에서 “미각이 느끼는 감각은 비정신적인 영역에서 즐거움을 주는 데 반해, 후각은 정신적 차원의 감각으로 함께 했던 사람과 장소, 상황과 감정 등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떠오르게 한다.”라고 말한다. 그가 이어서 설명하는 것처럼 우리가 ‘맛’이라고 표현하는 것들의 대부분이 ‘향’인 경우가 많다. 코를 막고 음식을 먹어보거나 감기에 걸려서 음식의 맛을 제대로 맛볼 수 없는 경우를 생각하면 쉽게 수긍이 간다.
우리는 어떤 냄새를 맡을 때 과거의 어느 순간을 회상하기도 한다. 길거리를 지나다 맡는 구수한 청국장의 냄새는 메주를 주렁주렁 매달아 둔 시골집 부엌의 하얀 벽을, 두부찌개의 김에 서린 냄새는 막걸리 한 사발을 손에 들고 입맛을 다시던 인부들의 표정을 연상시킨다. 알코올 음료 중에서는 와인이 가장 자주 그러한 계기를 만들어준다. 와인이 선사하는 다양한 후각적인 매력 때문이다.
나는 리슬링을 좋아한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잘 숙성된 리슬링에서 흔히 맡을 수 있는 페트롤 향 때문이다. 페트롤 향 자체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 향을 맡으면 어릴 적 오토바이를 탄 아버지 등에 매달려 논밭을 지나고 야산을 넘어 할아버지 산소에 가던 한식과 추석의 날들이 종종 기억난다. 아버지가 처음으로 구입한 지프가 요란한 모터 소리를 내며 배기가스를 내뿜던 순간들도 떠오른다. 시골에서의 그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은 내게 행복 그 자체로 남아있다. 어머니가 살아있었고, 그러한 교통수단을 가진 것이 내가 살던 동네에서 처음이었기 때문에 큰 자랑이기도 했다.
싱그러운 풀 내음이 강한 소비뇽 블랑을 마시면 딸아이가 처음 걷기 시작했을 때가 연상되기도 한다. 야외공원에서 힘겹게 몇 발자국 걷다가 내 품에 안기기 전에 쓰러져 넘어진 순간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게뷔르츠트라미너 와인을 마실 때면 리치 향 때문에 독일에서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고속도로변에 있는 한 중국 음식점에서 처음으로 리치로 만든 디저트를 먹었던 생각이 난다. 햇빛은 강했지만 바람이 많이 부는 어느 초가을 날이었다.
동물 향이 강한 와인을 마실 때면 노이슈반슈타인(Neuschwanstein) 성을 관광하기 위해 독일 남부로 갔다가 마구간이 있는 저렴한 민박집에서 숙박하면서 냄새 때문에 다소 불편해했던 1990년대의 어느 여름날을 자주 기억한다. 2016년 아르헨티나의 멘도사에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와이너리 카테나 자파타(Catena Zapata)에서 말벡 와인을 시음했을 때 맡았던 라벤더 향은 이 와이너리의 광활한 포도밭과 함께 아버지를 모시고 일본 홋카이도 후라노의 라벤더 밭을 걸었던 비 오는 날을 기억나게 했다.
그러나 마이클 슈스터와는 달리 나는 후각이 아닌 미각을 통해서도 종종 회상을 한다. 특히 프랑스 남부의 와인산지인 루시옹의 콜리우르(Collioure) 마을에 갔을 때 도멘 드 라 헥토리(Domaine de La Rectorie)라는 와이너리가 그르나슈 그리 품종으로 생산한 아주 짭짜름한 맛의 화이트 와인을 맛보았을 때 그랬다. 칠레의 레이다 밸리(Leyda Valley)에 갔을 때 스테파노 간돌리니(Stefano Gadolini)라는 와인메이커가 만든 아주 짠맛이 강한 소비뇽 블랑을 마셨을 때도 그랬다. 부모님과 함께 처음으로 해수욕을 갔다가 바닷물을 먹고 토했던 어린 시절의 여름, 제주도로 신혼여행 갔던 순간들이 내 가슴에 뭉클하게 다가왔다. 김훈이 『자전거 여행 1』에서 ‘바다의 짠맛과 햇볕의 향기로 소금은 탄생한다’라는 글을 읽으며 그의 관찰력과 화려한 언어에 감탄했던 것이 기억나기도 했다. 신맛이 불쾌할 정도로 강한 와인을 마실 때면 사과를 먹으며 신맛 때문에 얼굴을 찌푸리던 할머니의 모습이, 유쾌하지 못한 단맛을 가진 저렴한 와인을 겨울에 마실 때면 어려서 꿀에 잰 인삼을 먹던 겨울날들이 생각나기도 한다.
< 도멘 드 라 헥토리(Domaine de La Rectorie)의 포도밭>
<칠레의 레이다 밸리에서 시음한 스테파노 간돌리니가 생산한 와인들>
와인을 마시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냄새에 비교적 민감하면서도 기억 속에 저장된 추억들이 많을수록 이러한 경험을 많이 더 많이 하지 않을까 싶다. 위대한 문학가의 작품에서 이러한 예를 발견하게 되면 유난히 반갑다. 예를 들어 헤세의 첫 장편소설인 『페터 카멘친트』에서 헤세는 펠틀리너(Veltliner, 이태리의 롬바르디아에서 생산되는 발텔리나(Valtellina)와인의 독일어 식 표기) 와인을 마시며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점차 나는 와인과 와인의 효과를 구분하게 되었고, 대체적으로 보아서는 아직 소박하고 거칠었지만 일종의 자각을 갖고 그것들을 즐겼다. 결국 나는 진한 적색의 펠틀리너(Veltliner)에서 의지할 곳을 찾았다. 이 와인은 첫 잔에 떫고 자극적인 맛이 나지만, 이어서 내 생각을 몽롱하게 하고 잔잔하고 끊임없는 몽상에까지 이르게 했다. 그리고 나면 와인은 마술을 부리고 창조하며 스스로 시를 짓기 시작했다. 나는 내 마음에 들었던 모든 풍경이 근사한 조명을 받으며 내 주위를 둘러싼 것을 보았으며, 나 스스로가 그 안에서 돌아다니고, 노래하며, 꿈을 꾸고, 북돋워진 따스한 생명이 내 안에서 도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는 민요를 듣는 것처럼, 내 곁을 스쳐 지나가 놓쳐버렸을지도 모르는 커다란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처럼 너무나 유쾌한 비애로 끝을 맺었다.”
WRITTEN BY 박찬준 (Chan Jun Park)
Wine Writer / Consultant / Lecturer
Asia Director of Asia Wine Trophy
등록된 코멘트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