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하고도 아름다웠던 여름을 보내며
잔인하고도 아름다웠던 여름을 보내며
긴 꿈을 꾼 것 같다. 깨어나보니 쉽게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가을이 성큼 다가와있다. 얼마나 기다렸던 가을인가. 그러나 내 서재의 책상 위에는 불안했던 여름의 땀냄새가 아직도 남아 있다. 수많은 메모가 여전히 뒹굴고, 먼지가 소복하다. 가을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지난 여름은 잔인하고도 아름다웠다. 기록적인 더위, 폭우와 태풍으로 인한 초조함, 스트레스와 긴장, 불안, 그리고 부족한 수면에 힘들어했지만 머무르고 싶은 순간이기도 했다.
그들은 웃으며 떠났다. 멀리서 날아오는 새로운 소식이, 아니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들이 어느덧 추억으로 변한 경험을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 나는 눈을 감는다. 기억들이 뒤섞이기 시작한다. 삶과 영화와 소설 속 이야기들이 마치 카드처럼 섞인다. 거기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King도 있고 아름다운 Queen도 있다. 나는 Joker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이번에도 어설프게 공연했지만 행복한 조명을 받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독일의 가수 마티아스 라임(Matthias Reim)의 노래 ‘Rampenlicht(각광)’을 여러 번 들어야 했다.
“공연을 마친 뒤 (Nach dem Auftritt)
시간은 너무나 빨리 흘렀다 (die Zeit verging so schnell)
나는 피곤하면서도 행복하게 (gehe ich müde aber glücklich)
호텔로 돌아간다... (zurück in mein Hotel...)
내일 나는 (Morgen bin ich)
다시 고속도로에서 달린다 (wieder auf der Autobahn)
계속 이어진다 (es geht weiter)
시간은 절대 멈추지 않는다... (die Zeit hält niemals an...)“
그러나 잠시 시간이 멈춘듯한 순간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작별의 아쉬움을 달래던 밤, 믿어준 것에 고마워하던 밤, 한동안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던 것들이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감을 느끼던 밤, 무대 뒤에서 힘들어했던 사람들에게 미안한 생각을 하던 밤, 이기적이라고 생각되는 비난을 간접적으로 전해 듣던 밤에. 마음이 짓눌릴 때나 작은 소망이 있을 때 자주 듣던 Mariza의 멋진 파두(Fado) ‘Quem Me Dera’가 내 핸드폰에서 들려오자 나는 바보처럼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냥 서있기가 힘들어서 걷기 시작했고 결국 주저앉았다. 로이 킴의 노래 ‘그때 헤어지면 돼’가 주머니에서 흘러 나온다. “남들이 뭐라는 게 뭐가 중요해요. 서로가 없음 죽겠는데 뭐를 고민해요. 우리 더 사랑해도 되잖아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하던 밤이었다. 우리들은 서로 부둥켜안았고 우정을, 땀을 예찬했다.
시간은 여지없이 흐른다. 나도 모를 리가 없다. 이제 꿈을 꾸기 시작한다. 어느 깊은 가을 날 공기와 경치가 좋은 곳에서 맛있는 에스프레소 한 잔 마시며 하늘의 별들이 낮게 내려와 반짝이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때 아름다운 음악이 있다면, 그때 재미있는 책 한 권이 내 손안에 있다면, 그때 그리워하는 것들이 있고 소박하더라도 새로운 꿈이 있다면, 나는 설사 로시난테를 탄 돈키호테보다 더 비현실적인 상상을 하더라도 행복할 것이다. 이것이 나를 미소 짓게 만든다. 그러나 아는 만큼만 꿈꾸고, 보는 만큼만 느끼게 되리라.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참으로 많다. 이러한 인식을 새로 하게 만들어준 지난 여름의 경험들에 감사한다. 그 속에서 행복한 몸살을 앓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와인 한 잔 멋지게 마실 날을 기대한다. 지난 5월말 이태리의 리구리아에서 베르멘티노(Vermentino)로 만든 사르티콜라(Sarticola)를 마시며 여름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했던 그날을 기억하며, 또한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가 쓴 <파리의 우울>에 나오는 글 ‘머리카락 속에 반구(半球)’를 읽으며 다시 사르티콜라 한 잔을 마실 날을 기다린다. 그렇게 여름을 보내련다.
“그대의 머리카락 냄새를 오래오래 들이마시게 해주오. 갈증 난 남자가 샘물 속에 얼굴을 묻고 있듯, 그대 머리카락 속에 내 얼굴을 푹 묻고, 내 손으로 그대의 머리카락을 향기 나는 손수건처럼 흔들게 해주오. 추억들을 공중에 흔들기 위해.”
나는 그리워한다. 고로 존재한다.
와인은 그리움이다.
WRITTEN BY 박찬준 (Chan Jun Park)
Wine Writer & Consultant
University Lecturer (Kyung Hee University, Catholic University of Pusan)
Asia Director of Asia Wine Tr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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