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기다림의 동반자(1)
와인, 기다림의 동반자(1)
독일의 작가 프리드리히 폰 보덴슈테트는 “겨울에는 봄을 기다리며 와인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봄이 오면 봄이 왔음을 기뻐하며 다시 와인을 마신다”는 시를 썼다. 겨울은 힘든 세월, 각고의 시간을 상징하기도 하고, 봄은 결실 혹은 희망을 상징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의 시를 읽으면 언뜻 와인을 마시며 어려움을 이겨내고, 와인을 마시며 즐거운 순간이 찾아온 것을 만끽하는 모습이 눈앞에 스쳐 지나간다. 어쩌면 폰 보덴슈테트는 겨울에는 햇와인을, 봄에는 조금 더 숙성된 와인을 마시는 기쁨을 노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라는 단어가 다른 해석을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게 한다고 생각한다. 즉, 좋은 날들이 오기를 기다리며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 도움을 주는 동반자로서의 와인과 즐거움을 공유하면서 과거 시절을 상기도 시켜주는 동반자로서의 와인을 예찬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치 않을까 싶다.
칠레의 도시 산티아고, 발파라이소, 이슬라 네그라에 있는 파블로 네루다가 거주했던 집들을 파블로 네루다 재단에서 기념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산티아고에 있는 기념관 ‘라 차스코나(La Chascona)’에 갔을 때 그도 폰 보덴슈테트와 같은 심정으로 와인을 마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네루다는 1953년 이 집을 당시의 은밀한 연인이었던 마틸데를 위해 짓기 시작했다. 마틸데의 붉으면서도 산발인 헤어스타일 때문에 네루다는 그녀에게 ‘라 차스코나’라는 별명을 지었었는데, 이 별명을 그 집의 이름으로 정한 것이다. 1953년에 네루다는 당시의 두 번째 부인인 델리아와 살고 있었다. 그래서 ‘라 차스코나’에는 마틸데 혼자를 위해 거실과 침실만 지었다. 1955년 네루다는 델리아와 이혼하고 ‘라 차스코나’로 이주하게 된다. 그러면서 부엌, 다이닝 룸, 와인 바, 서재 등이 추가로 건축되었다. 정원에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소박하게 꾸며진 와인 바를 보는 순간, 네루다가 세 번째 부인이자 마지막 부인인 마틸데와 드디어 함께 동거하며 이곳에서 와인을 마시며 느꼈을 행복과 이 행복을 기다렸던 순간들에 가졌을 열정적인 사랑의 고통이 교차하면서 내 가슴 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라 차스코나에 있는 와인 바>
영국의 주류 미디어 매체인 The Drinks Business는 2014년에 세계의 와인에 대한 시 Top 10을 선정한 적이 있는데, 아쉽게도 아직 국내에서 번역판을 볼 수 없는 네루다의 <와인에 바치는 송시>를 두 번째 자리에 올렸다. 1954년에 발표된 이 시에서 “My love, suddenly, / your hip / is the curve of the wineglass / filled to the brim, / your breast is the cluster, / your hair the light of alcohol / your nipples, the grapes / your navel pure seal stamped on your belly of a barrel, / and your love the cascade of unquenchable wine, the brightness that falls on my sense / the earthen splendor of life.”라고 에로틱하게 쓴 부분은 마틸데를 염두에 둔 것임에 틀림없다. 네루다의 기다림을 동반하는 와인에 몸과 마음으로 스며든 마틸데!
우리는 스트레스 때문에, 실연 때문에, 가족이나 친구의 병과 죽음 때문에, 넓은 의미로 삶에 부수되는 각종 고통 때문에 술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오죽하면 헤르만 헤세도 “펜과 붓으로 작품을 창조해내는 것은 내게 와인과도 같아서, 그것에 취한 상태가 삶을 그래도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따스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준다.”고 적었을까. 그러나 헤세는 문학작품, 수채화, 와인을 통해 삶의 고통을 헤쳐나가는 지혜를 갖고 있었다.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 또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 그리고 한 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 하나님을 위하여”라고 노래하는 조지훈의 시 <사모>는 실연의 아픔을 숭고하게 승화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고통과 어려움을 견디기 위해, 이러한 것들로부터 해방되는 시간을 기다리며 마시는 한 잔의 와인과 그로 인한 취기는 사실 우리의 영혼이 필요로 하는 디오니소스의 귀중한 선물이다.
WRITTEN BY 박찬준 (Chan Jun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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