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와인(Einheitswein, Unification Wine)
통일와인(Einheitswein, Unification Wine)
"한국과 독일의 특별한 유대관계는 민족 분단의 역사에서 비롯됩니다. 먼저 통일을 이룬 한국의 친구로서 말씀 드리자면 가장 중요한 것은 솔직한 대화입니다. 이해와 타협의 자세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대화가 필요합니다." 이달 11일부터 3박 4일 일정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한 요아힘 가우크(Joachim Gauck) 독일 대통령은 지난 12일(월) 국회 본회의장에서의 연설에서 이같이 말했다고 한다. 가우크 대통령의 방문은 우리의 광복 70주년과 분단 70년, 독일 통일 25주년을 맞이한 해에 이뤄져서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10월 3일이 독일 통일기념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10월 한국 방문이 어떠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지도 알 수 있다.
지난 9월 29일 독일에서 와인 관련 가장 유명한 대학인 가이젠하임대학교(Hochschule Geisenheim University)의 국제와인비즈니스 과정(International Wine Business) 에릭 슈바이커트(Eric Schweickert) 교수에게서 이메일을 받았다. 독일의 통일 25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통일와인(Einheitswein)’에 관한 자료를 보내준 메일이었다. 사실 필자는 지난 7월 중순 부산 가톨릭대학교 와인과정 수강생들과 함께 독일 와인투어를 갔을 때 하네스 슐츠(Hannes Schulz) 총장의 초청으로 가이젠하임대학교를 방문하고 통일와인의 병입과정을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통일와인에 대한 설명을 하고 안내를 맡은 에릭 슈바이커트 교수가 10월이 오기까지 가능하면 ‘보안’을 유지해 줄 것을 요청하여 그 동안 통일와인 프로젝트에 관한 언급을 가능하면 자제하고 있었다. 지난 9월 중순 폭스바겐 배출가스 조작 사건이 세계의 언론을 강타하기 시작한 탓인지 통일와인에 대한 소개를 하는 것을 잊고 있었는데 슈바이커트 교수의 이메일은 가우크 대통령의 방한 소식과 함께 한반도가 평화적으로 통일될 때 우리나라의 와인애호가들은 어떠한 와인으로 축하의 건배를 할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만들었다. 그 날이 오면 독일에서 만든 통일와인에 대한 이야기를 되새겨 볼 것이라고 벌써 짐작해 본다.
독일의 통일과 관련하여 사실은 이번에 소개하는 통일와인 보다는 ‘진지한’ 와인을 이미 접해본 경험이 있다. 모젤의 대표적인 젝트(Sekt) 생산자인 SMW가 1989년 빈티지의 젝트와 리슬링 와인에 같은 해의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평화롭게 무너지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라벨에 사용한 적이 있는데, SMW의 오너인 아돌프 슈미트(Adolf Schmitt) 모젤와인협회 명예회장의 배려로 이미 국내에서 이 와인을 시음해본 사람이 여러 명 있다. 또한 1990년에 팔츠와 라인헤센의 4개 와이너리가 공동으로 ‘Durchbruch’(두르히부륵)이라는 이름을 가진 1989년 빈티지의 와인을 생산한 적이 있는데 ‘두르히부륵’은 ‘뚫어 부숨’, ‘타개’, ‘돌파’, ‘무너짐’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것을 상징한다.
/SMW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순간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라벨에 사용한 와인/
통일와인은 한 때 자민당(FDP) 소속으로 독일 연방 하원의원이었으며 현재 가이젠하임대학교의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에릭 슈바이커트 교수가 독일정부의 후원을 받아 추진한 프로젝트이다. 지난 10월 3일 베를린에서 열린 독일 통일 기념행사에서 공식으로 소개되었다. 독일 통일 25주년을 기념한 이 와인의 빈티지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에서 25년이 지난 2014년이다. 이전의 서독과 동독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독일 13개 와인산지의 와인을 한 병에 담아 진정한 의미에서의 통일을 상징하게 만들었다. 슈바이커트 교수가 중심이 되고 약 500명의 가이젠하임대학교 학생들이 프로젝트로 만든 통일와인은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의 2종이다. 각각의 병에는 13개 산지에서 생산된 와인을 모두 담았다. 화이트 와인의 경우 독일을 대표하는 리슬링이 약 60%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질바너(Silvaner), 샤르도네(Chardonnay), 뮐러-투르가우(Müller-Thurgau), 쇼이레베(Scheurebe), 피노 블랑(Pinot Blanc), 졸라리스(Solaris)로 만든 퀴베이다. 레드 와인은 피노 누아가 90%를 차지하고 도미나(Domina)와 레겐트(Regent)가 섞인 와인이다. 13개 와인산지 별로 각각 하나의 와이너리가 참여했고 사용된 와인의 등급도 다양하다. 여기에 참여한 와이너리들은 가이젠하임대학교의 학생들과 관계가 있는 와이너리들이다. 가족이 운영하거나 인턴쉽을 한 와이너리이거나 학생들이 회원인 생산자조합이 참여했다. 가장 이상적인 퀴베를 만들기 위해 다양하게 샘플을 만들어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했는데 놀랍게도 독일 각 와인산지에서 생산하는 와인이 독일 전체의 와인에서 차지하는 비율과 유사하게 배합된 것이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화이트 와인의 라벨은 가이젠하임대학교 학생들이 직접 디자인했는데 통일된 독일의 지도에 이전의 동서독 국경이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또한 독일의 13개 와인산지가 표시되어 있다. 분단된 독일, 현재는 통일된 독일을 상징하는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은 독일 지도상 베를린의 위치에 노출시켰다. 정적인 분위기의 지도가 브란덴부르크 문의 이미지로 인해 역동적인 역사의 흐름을 보여주는 듯한 변화를 갖게 된 것 같다. 레드 와인의 라벨은 독일의 아티스트인 수잔네 티체(Suzanne Titze)가 독일의 국기에서 사용되는 3색을 사용하여 추상적으로 디자인했다. 지난 7월 가이젠하임대학교를 방문했을 때 화이트 통일와인을 접해보지는 못하고 라벨만 볼 수 있었다. 반면에 레드 통일와인을 병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시음도 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품종을 사용했는지 듣지 않았지만 피노 누아로 만든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도미나와 레겐트가 10% 정도 들어간 것은 최근에 독일에서 받은 자료를 통해 알게 되었고 그 사실을 시음하면서 짐작하지는 못했다.
0.75 리터의 화이트 통일와인은 2,313병, 레드 통일와인은 1,243병, 0.2 리터의 화이트 통일와인은 500병이 생산되었는데 이 와인을 약 100여명의 와인 기자와 블로거들에게 보내서 통일와인을 시음해 보게 하고, 이에 대한 글을 쓰도록 유도하였다. 대부분의 통일와인은 독일 대통령궁과 장관들이 구입했고, 주독 한국대사관도 통일와인의 아이디어에 고무되어 여러 병 구입했다고 한다. 독일의 경우 단일품종으로 만든 와인이 대부분이며 퀴베를 생산하는 경우는 아주 드문 편이다. 또한 까다로운 독일의 와인법 때문에 여러 개의 와인산지에서 생산된 와인을 섞어서 병입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통일와인을 시도해볼 만큼 독일 통일 25주년은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학생들에게는 와인마케팅이라는 측면에서 흥미로운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염원인 한반도의 평화적인 통일이 마침내 이루어질 때 우리 와인애호가들은 어떠한 와인으로 그 역사적인 순간을 축하하며 건배할까? 북한에서도 와인이 생산된다고 하는데(심지어 카베르네 프랑으로) 언제쯤 이러한 와인들을 쉽게 접해볼 수 있을까? 우리도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질지도 모를 통일와인을 맛볼 수 있을까? 벌써 이러한 것들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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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박찬준 (Chan Jun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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