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메를로(Madame Merlot)에게
마담 메를로에게
나는 당신의 오른쪽 어깨가 부럽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노래를 부를 때에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젖히는데 그때마다 당신의 어깨가 당신의 얼굴을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당신의 왼쪽 어깨에서 편안함을 느낀 적이 있어요. 100% 메를로를 사용하여 100일 동안 Skin contact를 하고 만든 “100 days”라는 매력적인 와인을 스페인 음식에 곁들여 반 병쯤 마시고 난 후, 음악을 듣다가 피로감을 견디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당신의 왼쪽 어깨에 이마를 대고 그만 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보르도의 우안에서 좌안에서보다 메를로의 비율이 더 많은 보르도 블랜딩이 생산되고, 지구의 온난화 현상 때문에 오스트리아와 같은 cool climate 지역에서도, 특히 부르겐란트(Burgenland) 지방에서 멋진 메를로를 생산하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 이야기 해봅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였던 앰브로즈 비어스(Ambrose Bierce, 1842~1914)는 통렬한 풍자와 경구(警句)로 가득 찬 그의 저서 <악마의 사전>(1906)에서 “마담, 와인은 신이 남자에게 준 여자 다음으로 좋은 선물입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와인을 의미하는 불어의 Vin, 이탈리아어의 Vino, 독일어의 Wein은 모두 남성명사입니다. 보통은 보르도의 와인을 ‘와인의 여왕’ 혹은 ‘여왕의 와인’, 부르고뉴의 와인을 ‘왕의 와인’ 혹은 ‘와인의 왕’이라고 부르며, 이와 정반대를 주장하는 경우도 가끔 있습니다. 이태리의 바롤로 와인을 ‘와인의 왕’, 바르바레스코를 ‘와인의 여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수식어들은 이 글을 바치는 ‘마담 메를로’에게 의미가 없습니다. 메를로가 내게는 여성적인 와인이고 그래서 ‘마담’이라는 단어가 이미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앰브로즈 비어스도 이 경우만큼은 가장 좋은 선물과 다음으로 좋은 선물의 구분을 하지 않았을 테지요. 또한 ‘마담 메를로’는 그냥 와인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인연이기 때문입니다.
메를로라는 단어는 티티새를 의미하는 불어의 merle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카베르네 소비뇽에 비해 산도가 낮고, 부드럽고, 풍미가 달콤하여 일찍 마실 수 있는 장점이 있지요. 알코올 도수는 더 높지만 타닌이 보다 적은 편이어서 즐기기도 좋습니다. 풍부한 과일 향과 부드러운 질감이 매력적이고, 새 오크통에서 숙성되었을 경우 버터나 크림 향이 추가됩니다. 초콜릿, 모카 혹은 가죽 향을 느낄 수도 있는데, 내 개인적으로는 더운 기후보다는 온화한 기후에서 자라 검은 과일 향보다는 붉은 과일 향이 더 두드러지고 새 오크통에서 숙성되었으며 가죽 향을 느낄 수 있는 메를로를 선호합니다.
그리고 메를로는 그 자체만으로도 멋진 와인이 만들어지지만 다른 레드 품종, 특히 카베르네 소비뇽, 카베르네 프랑과의 블렌딩에 자주 사용되는 것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독립적인 개성이 강하면서도 사교, 친화적인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비유가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보도 클뢰스(Bodo W. Klös)라는 독일의 아티스트는 이러한 메를로의 특징을 살려 아래와 같이 ‘Madame Merlot’라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카베르네 소비뇽, 말벡, 네비올로, 쉬라즈, 템프라니요 등보다 바디감이 적은데도 지나치게 글래머를 그린 것이 아쉽게 생각됩니다. 보르도나 캘리포니아의 메를로가 카베르네 소비뇽 보다 좀 더 부드럽고 살집이 있으며, 풍만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에 더 주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아주 특별한 날에 메를로의 비율이 높은 생테밀리용의 레드 와인을 마신 기억이 납니다. 그랑 크뤼인 Château Tour de Bardes의 2010년 빈티지!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모습을 레이블에 담은 1989년 빈티지의 리슬링 젝트를 이날 먼저 마신 것도 우연의 일치치고는 절묘했지요. 지난 시절 레드보다는 화이트를, 특히 리슬링을 선호했던 나의 취향이 바뀌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기혁은 <색의 인문학>이라는 저서에서 분홍이 봄날의 색이면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고 연상하는 색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밤만은 그댈 위해서 분홍색 립스틱을 바르겠어요. 그대 가슴에 지워지지 않은 분홍의 입술자국 새기겠어요…”,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이러한 노래의 가사들을 그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이 과학자들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두뇌의 화학적 작용으로 보고 있는 것을 언급하며 3년 이상 지속되는 열정적인 사랑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합니다:
“술을 마시면 알코올이 중추신경을 마비시켜 정신이 몽롱해지고 감정이 격해지는 현상과 유사하다.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끼면 대뇌의 변연계에서 화학적 작용이 시작되면서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어 그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낀다. 사랑의 열정에 눈이 멀게 되면 중추신경을 자극하는 페밀에틸아민이 분비되고 이때쯤 되면 사랑하는 사람을 껴안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면서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되는데 이 물질로 인해 성적행동이 유발된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러한 열정적 사랑은 길어야 30개월 이내에 사라진다.”
사람들이 자주 “우리의 인연이 다하는 때까지…”라고 말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와인 애호가이며 철학자인 티에리 타옹(Thierry Tahon)이 쓴 책 <와인의 철학, Petite Philosophie de L’Amatur de Vin>에 나오는 내용은 어쩌면 위와 같은 ‘과학적 바탕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와인은 어디까지나 욕망이지 결코 필요가 아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와인은 욕망의 대상으로 머물러야 한다. 금욕적인 시간들을 욕망을 충족함으로써 얻는 쾌락의 시간들 사이에 짧지 않게 둠으로 인해 욕망의 강도와 질을 보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욕망들을 잘 감시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그것들을 세월의 흐름으로부터 보호하고 유지해야 하며, 욕망이 약해지지는 않는지, 욕망의 대상이 흐릿해지지는 않는지 잘 살펴야 한다.”
와인을 마신다는 것, 우리의 영혼이 욕망하는 와인을 마신다는 것,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이성적으로 와인을 마신다는 것은 – 우리가 와인이 주는 여러 가지의 매력적인 자극 앞에 기꺼이 무릎을 꿇는 하나의 육체이지만 – 미국의 심리학자인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Maslow)의 욕구단계 이론에서 최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스스로에게 있고, 상대의 존중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가능하지 않을까요? 아무튼 봄날이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여름이 많이 기다려주면 좋겠습니다.
WRITTEN BY 박찬준 (Chan Jun Park)
Wine Writer / Consultant / Lecturer
Asia Director of Asia Wine Tr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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