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와인의 칼라와 포도문자

2021.05.12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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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와인의 칼라와 포도문자

2010년 여름에 독일의 와인산지 아르(Ahr)에 있는 마을 마이쇼쓰에서 ‘포도꽃 축제(Weinblütenfest)’에 참가한 후에
독일의 와인산지 라인가우에 있는 게오르크 뮐러 슈티프퉁(Georg Müller Stiftung)이라는 와이너리를 방문하게 되었다. 
독일우수양조자협회(VDP)에 속한 약 200개의 회원 와이너리 중의 하나일 정도로 우수한 와인을 생산하지만, 
지하에 있는 와인 저장 창고가 오크통에서 숙성 중인 와인과 이미 오래 전에 병입된 와인뿐만 아니라 예술작품으로도 가득 차 있어서 호기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이 와인 저장 창고를 ‘아트 셀러(Kunstkeller)‘라고 부른다. 그리 넓은 공간은 아니지만 아주 독특하고 아름다워서 방문객이 많으며 간편한 식사를 겸한 단체 대상의 시음회가 자주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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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셀러에 전시된 예술작품들/


이 와이너리의 오너인 페터 빈터(Peter Winter)는 독일와인수출가협회의 명예회장이기도 하고, 부인은 비스바덴(Wiesbaden)에서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부인과 함께 여러 해 전에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에 참가하여 유럽의 아티스트 작품을 판매하기도 하였다. 필자의 소개로 와인 잔 그림으로 유명한 포토리얼리즘의 유용상 화가가 2012년 11월에 게오르크 뮐러 슈티프퉁 와이너리에서 초대를 받아 전시를 하기도 했다. 그가 전시한 작품 중에 일부는 페터 빈터가 구입하여 다른 아티스트 12명의 작품과 함께 ‘아트 셀러‘에 영원히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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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셀러‘에‘ 전시되어 있는 유용상 화가의 작품/


2010년 여름에 처음으로 ‘아트 셀러‘를 관람하고 이어서 지상에 있는 시음 공간에서 와인을 시음하게 되었다. 이 때 레드 와인의 칼라를 표현한 예술작품이 하나 벽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에 필자는 마셔 본 와인의 칼라를 간직하는 것이 가능할까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었기 때문에 이 작품을 보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유감스럽게도 누구의 작품인지를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그 아티스트를 찾아내는 데 4개월이 걸렸다. 독일의 여류 화가 헬라 놀(Hella Nohl)! ‘필연‘으로 만나게 된 그녀의 예술세계는 단순하게 와인의 칼라를 표현하는 것 이상이었다.

1939년에 출생한 헬라 놀은 마인츠(Mainz)에 있는 대학에서 미술과 미술사를 전공했다. 1965년부터 1995년까지 교직에 있으면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86년부터는 아티스트로도 활동해 오고 있다. 1995년에 처음으로 레드 와인을 예술작품의 소재로 관심 갖게 되었고 1998년부터 와인을 주제로 한 자신의 작품들을 전시회를 통해 발표하기 시작했다. 비교적 고령이며 신체적인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매년 여러 회의 전시를 하는 등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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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에 앉아서 레드 와인으로 그림을 그리는 헬라 놀/



헬라 놀이 레드 와인의 칼라를 표현하게 된 것은 우연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1998년의 어느 날 저녁 레드 와인을 한 잔 마시며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던 중 붓을 물통에 담근다는 것이 실수로 레드 와인의 잔에 담갔다. 이로 인해 종이 위에 생겨난 레드 와인의 얼룩이 다음 날 아침에도 비교적 진한 붉은 톤으로 남아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때부터 레드 와인의 칼라 표현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레드 와인을 붓으로 종이에 바르는 순간, 레드 와인이 종이 위에서 마르는 과정 그리고 다양한 종이와 캔버스에서 같은 레드 와인이 어떻게 다르게 연출되는지에 대한 관찰을 했다. 그 결과 레드 와인의 칼라 표현에 적당한 종이와 사용이 불가능한 종이 사이를 구분하게 되었고 어떤 매체에 레드 와인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각각 다른 뉘앙스의 칼라가 나타나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캔버스 보다는 종이에 포도 품종과 포도의 숙성 정도에 따른 차이를 더 뚜렷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과 종이 중에서는 화학적인 처리를 하지 않고 인도에서 수공으로 만든 종이가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와인을 종이 위에 바르는 순간 종이가 약간 울게 되고 가장자리의 윤곽과 무늬가 생기는 현상이 와인 마다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도 발견하고는 이러한 현상을 예술적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와인을 여러 겹 칠할 때 그 색이 진해지는 모습을 나무테 형태로 표현하게 되었다. 헬라 놀은 2006년 8월에 마신 여러 와인의 칼라를 <8월의 시음>이라는 작품에서 표현하였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등에서 생산된 다양한 품종의 레드 와인이 각기 다른 칼라를 보이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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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 놀의 작품 <8월의 시음, Augustproben>, 2006/



헬라 놀은 작품을 완성하면 레드 와인의 칼라를 보호하기 위해 특별한 와니스를 칠한다. 그렇다고 초기의 칼라가 시간이 지남에도 불구하고 전혀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레드 와인이 테이블보나 밝은 색 옷에 묻었을 때 이 얼룩을 제거하기가 그리 간단하지는 않지만 화학적인 색 염료가 아닌 레드 와인이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 온도에 따라서 심지어는 오픈한 후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가에 따라서도 칼라가 변하는 것을 헬라 놀은 관찰에 의해서 정확히 알고 있다. 그렇다고 레드 와인의 칼라가 아주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윤곽과 칼라의 전조는 오히려 더 선명해지고 재미있게 변하기도 한다고 헬라 놀은 설명한다. 레드 와인은 살아있는 감각적인 색 재료이기 때문에 레드 와인을 이용해서 작품을 하나 완성해도 미적인 발전 과정은 지속된다고 말하며 “와인은 병 속에서뿐만 아니라 종이 위에서도 숙성하며 나이를 먹는다“고 멋지게 비유하여 표현한다. 영(young)한 와인일수록 칼라가 더 많이 변하고 종이 위해 표현된 와인의 칼라가 빛이나 공기에 얼마나 노출되느냐에 따라서 변화의 정도도 다르다고 말하며, 오래되고 잘 숙성된 보드로 와인의 경우 공기와 차단하여 유리 속에 보관하면 그 칼라가 거의 변화되지 않는다고 경험에 의해 설명한다. 와인 애호가인 헬라 놀이 그림에 사용한 와인들은 모두 직접 마셔본 와인들이다. 10년 이상의 경험을 통해 와인의 칼라를 보면 맛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특별히 어떤 와인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와인의 맛과 칼라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굳이 말한다면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나 친구가 생산하는 모모레토(Mormoreto)와 같은 이탈리아 와인을 좋아하는 편이라고 한다. 모모레토의 경우에는 칼라와 맛이 모두 마음에 들지만 자신이 즐겨 마시는 와인의 칼라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헬라 놀은 필요한 칼라에 따라 와인을 선택하기도 한다. 아름다우면서 진한 붉은 색 톤이 필요한 경우에는 남아공, 호주, 칠레에서 생산된 쉬라를 선택하고, 황금의 톤이 필요한 경우에는 오래된 와인, 특히 생테밀리옹의 와인을 선호한다. 푸르고 보랏빛 계열이 필요한 경우에는 레겐트(Regent), 도른펠더(Dornfelder), 생 로랑(St. Laurenta)과 카르미네르(Carmenere) 품종의 와인을 사용한다. 다만 이 경우 몇 달 후에 회색, 녹색 혹은 브라운 톤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덧붙여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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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 놀의 작품 <5개의 피노 누아, 5 Spätburgunder>, 2006/



와인을 주제로 한 예술작품에 헬라 놀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0년대 초에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와 베네토 지방에 갔을 때였다. 포도나무와 포도밭을 그리기 시작했고 얼마 후에 포도나무와 포도의 열(列)을 추상적인 문자로 표현하였는데 이를 ‘포도문자(Rebschrift)‘라고 부른다. 포도밭이 계절 별로 변하는 모습을 마치 악보같이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지금은 ‘포도문자‘와 레드 와인의 칼라를 동시에 보여주는 작품을 더 선호하는 헬라 놀은 와인 생산지를 방문할 때 사진작품을 찍어 보고 싶은 충동을 많이 느끼지만 신체적인 불편함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조만간 와인을 주제로 한 그림과 사행시를 담은 책을 출판할 예정이다. 포도나무와 포도를 추상적으로 형상화한 문자, 와인의 칼라에 대한 연구에 이어 문학적인 시도를 통해 또 하나의 와인예술을 추구하는 헬라 놀의 열정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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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 놀의 작품 <작은 포도문자 4단 블록, Kleine Schriftstücke Viererbl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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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박찬준 (Chan Jun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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