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난영의 이탈리아 와인] 08. 로마인처럼 로마의 휴일을 즐기자
로마인처럼 로마의 휴일을 즐기자
치타 델 비노 국제 와인 품평회(Concorso Enologico Internazionale Città del Vino, Selezione del Sindaco의 새 명칭, 이하 품평회)로부터 뜨끈뜨끈한 수상 결과가 도착했다. 1,250여 종의 와인이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그랜드 골드 메달은 32개 와인에, 골드 메달은 358개 와인에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눈을 씻고 봐도 메달리스트 안에는 실버 메달이 없다. 이유는? 출품된 와인 중 상위 30% 안에 드는 와인에게 메달이 돌아가는 OIV(국제와인기구)의 커트라인이 높아진 데 있다. 상향된 커트라인은 100점 만점 중 87점. 보통 85에서 91.9점이 골드메달 후보군인 데 이번에는 심사원들 간의 은어로 스트롱 골드(강력한 골드 메달 후보, 보통 87점 이상) 점수대에 턱걸이한 와인만이 메달의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
주최측은 올해 출품된 와인의 전반적 품질상승이 커트라인을 이끌어 올린 것으로 분석했으며 금년에 18회를 맞는 품평회는 무실버 메달의 첫 해로 기록될 거라 전했다. 개인적으로는 0.1점 미달로 수상권에서 밀려난 억울한 86.9점 와인들과 동료 와인들의 뜻밖의 선전으로 메달의 ‘메’ 자도 구경 못한 수 백개의 실버메달 후보들에게 유감스러운 마음뿐이다. 메달은 물 건너갔지만 누군가의 식탁에서 음식 파트너로 ‘엄지 척’ 인기를 독차지 해, 메달권 탈락의 한을 풀기를 바란다.
(요한 티슈바인의 작품 ‘캄파냐에서의 괴테’(1787년), 이미지 Wikipedia)
<로마인의 휴양지, 카스텔리 로마니>
매년 도시를 바꾸어 가면서 열리는 품평회는 올 해는 프라스카티(Frascati)에서 열렸다. 프라스카티는 로마 남동부 인근의 14군데 소도시를 한데 묶은 카스텔리 로마니(Castelli Romani)에 속한다. 로마 테르미니 기차역에서 기차를 타면 25분이면 도착하는 로마 위성도시다. ‘로마인의 성들’이란 뜻의 카스텔리 로마니는 14~15세기에 지어진 귀족 저택과 주변의 수려한 산과 숲, 화구호가 빼어난 경치를 뽐내는 휴양도시다. 워낙 로마가 유명하다 보니 로마의 그늘에 묻혀 지명도가 덜 하지만, 마을마다 자신만의 독특함으로 카스텔리 로마니란 모자이크를 이룬다.
모자이크 중 가장 찬란한 조각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로부터 온다. 독일 화가 요한 티슈바인이 그린 ‘캄파냐에서의 괴테’(1787년 작품)에서 비스듬히 누워있는 괴테 뒤로 보이는 시골 풍경이 카스텔리 로마니다.
(프라스카티 시내를 마주 보고 있는 언덕 능선을 따라 지어진 알도 브란디니 빌라)
1786년부터 2년간 이탈리아로 여행 왔을 때 괴테는 다른 도시보다 로마관광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고 한다. 로마 고전 건축양식에 빠져있던 괴테는 로마 귀족들이 자신들의 지위와 부를 과시할 목적으로 카스텔리 로마니에 지었던 빌라에 자주 다녀갔다. 프라스카티 시내를 마주 보고 있는 언덕 능선을 따라 지어진 알도 브란디니 빌라를 각별히 흠모했다고 한다. 그림 얘기로 돌아오면 괴테의 경제 후원으로 이탈리아에서 그림 공부에 전념할 수 있던 화가는 그 고마움을 그림으로 화답했다. 그림은 괴테를 젊고 낭만적인 예술가로 표현했다. 덕분에 후손들은 괴테를 항상 젊은 예술가로 기억하게 되었으니 화가는 두고두고 은혜를 갚은 셈이다.
<신비로운 네미호수>
네미 호수(Lago di Nemi)에 간 날은 비가 꾸적 꾸적 내렸다. 비구름은 화구호(화산의 분화구에 생긴 호수)인 네미 호수 언저리에 자리 잡은 네미 마을을 신비로운 베일로 감쌌다. 호수를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다는 벨베데레로 이끄는 길 양쪽에는 네미의 특산물인 딸기와 산딸기 주를 파는 보테가(상점)가 늘어서 있었다. 알고 보니 매년 6월 초에 열리는 프라골레 딸기 축제일을 코 앞에 놔두고 있었다. 축제기간에는 호수 변 포도밭에서 자란 몸집은 작지만 농축된 향기와 당도 높은 네미 딸기를 맛보려고 지구촌에서 몰려든 딸기 덕후들로 거리는 메어진다고 한다.
(딸기 축제와 ‘칼리굴라 황제의 배’ 전설로 유명한 네미호수)
딸기 외에 네미는 ‘칼리굴라의 배’로도 명성이 높다. 칼리굴라 황제는 길이 70m, 폭 25m의 거대 유람선 두 척을 건조해 호수에 띄워 사치스러운 휴가를 즐겼다. 지금은 호수 가장자리는 딸기밭으로 변해 거대한 배를 무슨 수로 감당했을까 싶지만 황제 시절만 해도 호수로 덮여있었다. 황제는 유람선에 싫증이 나면 유람선을 전투선으로 개조시켜 모의 해전을 벌이기도 했다. 황제가 사망하자 그를 눈의 가시처럼 여기던 로마 원로원은 배를 파손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례없는 규모와 사치스러움의 표본이었던 황제의 배는 제국의 값비싼 보물과 함께 호수 밑으로 사라졌다.
<로마인들의 와인, 프라스카티>
카스텔리 로마니의 성주들은 어떤 와인을 마셨을까? 프라스카티 마을의 전통과자 ‘푸팟자 프라스카타나(Pupazza Frascatana)’가 어느 정도 실마리를 준다. 과자는 언뜻 보면 여자 아이를 닮았지만 유방이 세 개나 달려있어 선뜻 먹는 걸 주저하게 된다. 생긴 모양만큼 탄생 스토리도 발칙하다. 수확철이라 갓난아기를 돌 볼 시간이 없던 한 엄마가 유모한테 아기를 맡긴다. 유모는 아기가 자꾸 울자 엉뚱한 꾀를 낸다. 가짜 유방을 만들어 안을 와인으로 채운 다음 젖인 척 아기한테 물렸는데 아기가 울음을 딱 그쳤다고 한다. 전설과 상술이 결합해 진실성은 애매모호 하지만 이 곳 사람들이 와인과 교감하는 법을 어릴 때부터 터득한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다. 결국, 좋은 와인을 마셔본 자만이 좋은 와인을 만들 확률은 높아지지 않을까!
(푸팟자 프라스카타나 전통과자)
과자는 꽤 단단해서 카넬리노 와인의 도움 없이는 먹기가 힘들다. 카넬리노는 카스텔리 로마니 토착 화이트 품종을 자연건조실에서 말려 당도와 향을 높인 스위트 와인이다. 과자를 와인에 담그면 와인을 빨아들인 과자는 식감이 부드러워져 입안에서 솜사탕처럼 녹는다.
카스텔리 로마니 전통음식은 로마의 식당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돼지의 삼겹살과 뽈 살을 염장한 판체타와 관찰레를 넣은 음식들은 짭짤함과 향신료 향을 발산한다. 여기에 페코리노 로마노 치즈를 뿌리면 구수한 맛이 날개를 단다. 일명 까르보나라와 아마트리차나로 대변되는 카스텔리 로마니의 맛은 가벼운 프라스카티 와인과 스푸만테와는 그만이다. 말바시아 델라찌오의 짠맛과 과일향, 말바시아 디칸디아의 산도, 트레비아노의 아몬드 향의 조화가 염장육의 녹진한 맛을 배가 시키고 느끼함을 말끔히 가셔 준다.
(좌: 트립빠 소내장 요리, 우: 포르게타 통돼지구이)
일명 로마식 통돼지구이 포르게타와 트립빠 소내장 요리는 대중적인 로마의 맛이다. 레스토랑에서는 격식 있는 메인요리로, 이탈리아 포장마차인 키오스크에서는 파니니(이탈리아식 햄버거)의 패티로 등장한다. 강렬한 향과 맛에 묵직함이 더해진 프라스카티 수페리오레와는 ‘묻지 마 궁합’이다. 포르게타는 돼지 뼈를 발라낸 뒤 각종 향신료를 바른 후 끈으로 단단히 묶어서 서서히 구운 통돼지구이다. 바삭바삭하게 구워진 껍질을 열면 향신료 향을 머금은 부드러운 살코기가 불거져 나온다.
프라스카티 와인(수페리오레, 스푸만테, 스위트 와인 포함)은 말바시아 디 칸디아, 말바시아 델 라지오, 트레비아노, 봄비노 비앙코, 벨로네의 토착 화이트 품종을 섞어 양조한다. 양조의 포인트는 품종 별로 갖는 고유 특징을 잘 선별해서 조화로운 풍미를 얻는 것. 조화로움의 비밀은 카스텔리 로마니의 비옥한 화산토양에서도 온다. 1만 9천 년 전 화산 폭발을 마지막으로 굳어버린 마그마와 화산재가 층을 이루어 땅 밑에 쌓였다. 포도밭에 불어오는 티레노해풍은 와인에 쌉쌀한 바다내음을 선사한다.
등록된 코멘트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