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용욱의 중세 유럽와인

2021.04.30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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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의 와인 



중세(Medieval Age)라는 단어는 18세기 무렵에 유럽의 지식인 계층특히 부르조아와 같이 계급성을 가진 신분이 호고주의(antiquarianism)에 기반해서 과거에 진지한 관심을 가지면서 등장한 개념이다그런 의미에서 그레코-로만 시대인 고전시대(Classical Period)와 자신들 기준에서 당시의 현 시점인 근대(Modern Period)의 사이에 놓인 시기를 언급하고자 중간 시기(Middle Period)로 중세를 규정한 것은 나름 적절한 시기 구분이다사실 중세는 인위적으로 규정되기는 했지만 여러 가지 사건과 그로 인한 시대정신이 앞과 뒤의 시대와 달리 뚜렷하게 존재한다대표적인 사례를 들어 보자.

 

1. 서로마제국의 붕괴(AD 476) 이후 라틴계 문화가 쇠퇴하고 다양한 북방 민족들의 이동으로 인하여 게르만노르만슬라브족 등의 점거와 문화권 형성이 이루어졌다.

2. 제국의 붕괴로 인하여 각지에서 군웅할거하는 소규모의 왕국과 공국이 지금 현재 유럽의 복잡한 지도의 근간을 이루었다.

3. 동방에서 이슬람 제국의 침입과 그 이후 더 동방에서 몽골의 침입이 이루어지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동방의 유전자와 문물이 유럽에 파급되었다.

4. 이러한 혼란기에서 가장 적절한 형태로 발달한 경제 체제는 폐쇄적 자급자족 체제이다그리고 이러한 체제가 가능하게 되는 것은 공고한 신분제 및 생산력을 제공하던 농노제도였다.

5. 이 모든 것에는 당시의 체제를 사상적물질적으로 뒷받침하면서 장악하던 기독교계의 막대한 영향력이 있었다.

 

결국 중세라는 개념을 지탱하고 유지하고 양생하던 이데올로기는 서로마 제국에서 만들어져 순식간에 전 유럽을 잠식하고 국교화 된 기독교라고 볼 수 있다이러한 기독교는 십자군 원정 및 비기독교 계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인본주의적 대오각성(르네상스 운동)의 영향으로 그 세력이 15세기를 기점으로 한풀 꺾이게 된다이 시점이 바로 중세의 종료라고 볼 수 있다.

 

중세의 시간적 개념을 이렇게 기독교와 이민족의 침입폐쇄적 자급자족 체제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풀어 보면 그 당시 와인 산업의 발전과 양상그리고 현대의 와인에 미친 영향을 조금 더 쉽게 알 수 있지 않나 생각된다로마제국 시기에 보편화 된 음료로 자리잡게 된 와인은 게르만족의 이동과 더불어 포도 재배 기술이 없던 북방 민족이 향유하던 맥주에일 등의 양조 기술도 함께 공유하게 된다즉 기존의 로마제국 와인이 우리나라의 막걸리와 같이 걸죽하고 탁한 음료로물과 섞어서 함께 공유되던 형태가 대부분이었다면중세시대부터 변방의 다양한 양조 기술 및 제품화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과 같이 탄산이 함유된 형태나 맑고 가벼운 형태의 와인이 등장하게 된다보르도 와인을 특별히 칭하는 클라레(claret)라는 단어도 비로소 이때부터 시작된다.


육로를 통한 북방 무역 및 해로를 통한 영국과의 교역에서 와인의 생산과 공급은 상당히 큰 이윤을 남겨주는 산업으로 자리잡게 된다. 또한 전 유럽에 파급된 기독교 및 교구의 형성과, 이로 인한 예배 및 봉헌 관습으로 인하여 와인은 수요와 공급량이 이전 시기에 비해 월등하게 성장한다. 이러한 와인 생산 및 유통업자 중 가장 유명한 집단이 바로 베네딕트(Benedictine) 수도사 집단이다. 당시 기준에 경이적인 수준과 생산량을 자랑하는 베네딕트 수도원 산하 포도원은 지금의 프랑스와 독일, 룩셈부르크 일대를 중심으로 드넓은 와인 생산 시설을 보유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샹파뉴, 보르도, 부르고뉴 및 르와르 강 주변과 독일의 라인가우, 팔츠 및 모젤 지역에 걸쳐서 와인을 생산하던 베네딕트 수도원은 로마 제국 당시 와인의 대표적 생산지이던 이탈리아를 제치고 현재 유럽의 주요 와인 생산 지역이 알프스 너머로 넘어가게 되는 생산과 유통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점조직 수준으로 파급되어 있는, 황제없는 제국과 같은 기독교 교구의 네트워크가 큰 역할을 하였다. 베네딕트 수도원의 와인 제작 및 배급이 현재의 와인 산업에 미친 영향 중 대표적인 것은 바로 동 페리뇽이 최초로 개발한 샴페인, 와인을 장기 숙성하는데 필요한 오크통과 셀라의 사용, 리슬링과 같은 품종의 재배, 그리고 당시 영국 땅이었던 보르도 지역의 와인이 해상 항로를 통해 영국으로 수출될 수 있는 유통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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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루아르 강변 부브레(Vouvray) 지역의 중세 수도원과 와인 생산 시설 및

와인을 음미하는 수도사의 모습 

 

중세의 유럽이 이렇게 기독교 교구를 중심으로 한 독점적 와인 산업을 발전시켜 나갔다면같은 시기의 아라비아 반도 및 서아시아 일대는 고대부터 이어지던 와인의 향유가 꾸준히 지속되고 있었다그리고 유통도 화폐경제에 기반한 활발한 상업적 교류를 통하여 이루어졌다이란의 도시인 시라즈(Shiraz)는 동명의 포도종이 기원한 곳이자 이슬람 세력이 정착하고 금주령을 선포하는 9세기 이전까지 대표적인 와인 물류 산지였다다른 주종에는 엄격해도 와인에게는 비교적 관대했던 당시의 이슬람 교리에 따라서 시라즈의 와인은 르네상스 이후인 17세기까지도 주요한 동방 무역의 산물로 자리잡고 있었다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적어도 와인이 향정신성 약물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당시의 착각에 근거한 것이다실제로 이슬람 제국이 형성되는 AD 7- 8세기 경의 지중해 지역은 교황의 세력과 비잔티움 제국의 세력권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와인의 생산과 소비가 지극히 제한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참고로 이 당시 활동한 이슬람 계통의 연금술사는 와인을 재료로 한 알코올성 주정을 최초로 개발하기도 하였다이러한 천연 알코올은 향료를 섞어서 향수 제조에 쓰기도 하였고 소독이나 치료용 약물로 활용하기도 했다증류주의 원천 기술을 통해 와인을 브랜디로 만들어 낸 곳이정작 지금은 술을 한 방울도 마실 수 없는 이슬람 지역이라면 역사의 아이러니인 셈이다.

 

중세의 사회가 농노제에 기반한 신권 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아무리 종교적으로 신성함이 결부될지언정 실생활에서조차 기독교적인 박애와 만민평등이 실천되지는 않았다특히 교황을 중심으로 한 성직자 집단은 당시의 독일 국왕인 신성로마제국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를 카노사의 굴욕(Humiliation at Canossa, AD 1075) 사건을 통해 무기력화 시키면서 유럽의 전권을 가지게 된다그 후 기독교 세력의 유럽 지배 및 세속적 군주와의 대립을 통한 실력 행사는 꾸준히 지속되어 왔다그 과정에서 와인 산업 등을 통한 부의 축적과 당시 성직자들에게 마치 암호와도 같이 작용하던 라틴어를 기반으로 한 지식의 비전(秘傳), 그리고 전근대적이고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세계관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암투와 음모 및 일반 대중의 무지몽매함이 중세를 다른 말로 암흑기(Dark Age)라 부를 수 밖에 없는 분위기를 만들었다이러한 기독교의 적폐에 근거한 중세의 암흑기는 1096년부터 1302년까지 진행 된 십자군 원정, 1348- 1350년에 최고조에 달한 흑사병, 1309년부터 1376년까지 7대의 교황 동안 이루어진 아비뇽 유수(Avignonese Captivity) 사건을 통하여 교황 세력이 한풀 꺾이고 근대성을 향한 일말의 계기를 마련한다그리고 그간 성직자들과 교구를 통해서만 독점적으로 향유되던 와인은 본격적으로 왕권 강화와 함께 왕족과 귀족의 상징으로 자리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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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아비뇽과 론 강 및 프랑스 최초로 AOC 등급을 받은 샤토뇌프뒤파프의 와이너리.

샤토뇌프뒤파프는 새로운 교황청이라는 뜻이다.

 


아비뇽유수는 와인 산업의 발달에 있어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의 사건이다당시 교회의 과세 문제로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대립한 프랑스 왕 필립 4세는 이전의 카노사 굴욕처럼 교황으로부터 파문 당하기 이전에 스스로 교황에게 이단의 혐의를 걸고 선제공격을 가한다그리고 사병을 파견해서 교황을 납치하고 재판에 회부한다그러는 와중에 교황 선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서 프랑스 보르도 지역의 클레멘스 5세를 차기 교황으로 선출하고 동시에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강제로 옮긴다당시 아비뇽은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였지만 론(Rhone) 강을 건너 프랑스와 맞닿은 곳으로서로마에서 군림하던 교황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로 옮겨와서 완전히 굴복시킬 수 있었다교황의 영입과 더불어 활황을 띄게 된 론 강 유역의 와인 산업은 교황 이름을 건 마케팅 장사인 샤토뇌프뒤파프(Chateauneuf-du-Pape)를 개발하였다그 후 프랑스 최초의 지역 특산물 공인 상품(AOC, Appellation d'origine controlee)으로 등극하면서 세계적인 와인으로 자리잡는다한편 이탈리아 내부에서는 교황과 기독교 세력을 먹여 살리던 알토란 같은 교황령이 무주공산화 되면서 베니스와 피렌체 및 시에나에서 와인 생산과 교역을 기반으로 한 신흥 가문들이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아비뇽유수가 마무리 될 즈음에는 백년전쟁이 벌어지면서 영국과 프랑스의 역사적 반목이 시작되었다여기에는 로마 출신 교황 우르바노 6세와 프랑스 출신의 선출 교황인 클레멘스 7세 파벌간의 대결 구도가 결부되는데처음에는 영국 측의 압도적인 우세였지만 차후 국력을 회복한 프랑스는 1453년에 카스티용(Castillon) 전투를 통해서 존 탈봇(John Talbot) 장군이 주둔하던 아키텐 지방(현 프랑스의 보르도 지방)과 가스코뉴 일대를 차지한다자신감을 얻은 프랑스는 이후 1477년에 낭시(Nancy) 전투를 통해서 당시 프랑스 왕권의 최대 대항마였던 부르고뉴 공국(Duchy of Burgundy)을 흡수 통합해 버린다현재 프랑스 최대 와인 산지 세 군데가 중세 말기에 교황권에 대항하고 영국 및 국내 호족 세력들을 토벌하면서 불과 100년 남짓 한 사이에 획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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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당시 영국 장군 존 탈봇의 영지에서 만들어진 보르도의 샤토 탈보(Chateau Talbot), 부르고뉴 공국 시절부터 와인을 생산하던 본(Beaune) 지역의 도멘 클로드라무스(Clos de la Mousse), 그리고 론 강 유역의 샤토뇌프뒤파프 지역에서 생산된 도멘 샤르벵(Domaine Charvin)

 

천년에 걸친 긴 시간 동안 유럽이라는 광활한 지역이 기독교라는 단일한 이데올로기에 좌우되었던 것은 새삼 놀라운 일이다그러나 이런 기간 동안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와인의 기틀이 잡혀갔으며고대 로마제국의 영향 하에 형성된 와인 산업이 본격적으로 교회 세력의 득세로 인하여 양적질적으로 성장해 간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예나 지금이나 특권과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와인의 이미지도 결국 당시 세상을 아우르던 기독교 세력 및 이에 대항하면서 공존하던 세속 왕조가 꾸준히 권력과 물욕을 독점하기 위해 상쟁해 온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군주의 판정승이라는 역사적 결과와 함께 종료되는 중세시대의 와인은 이후 르네상스 및 절대왕조를 맞이하면서 본격적인 귀족 문물로 자리잡게 된다현재에도 가진 자들의 허세 및 없는 자들의 콤플렉스 물적 대상화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오묘한 성격의 와인은 중세 때 이미 그 성격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유용욱

충남대학교 고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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