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은주의 와인 테이스팅] 08. LP판의 부활 그리고 오크향
나는 LP판을 경험한 세대다. 검고 둥근 디스크 음반으로 음악을 듣던 시절, 바늘 끝을 살짝 올려 놓으면 지지직 소리와 함께 미끄러지듯 흘러나오던 음악은 어찌나 감미롭던지, 사춘기의 감상까지 더해져 밤잠 못 이루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CD라는 새로운 제품이 나오게 되었고 나는 남아있던 음반과 테크를 어떻게 처분했는지 기억조차 안 날만큼 쉽게 잊혀져 갔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게 변해간다. 와인 하면 떠오르는 상징물 가운데 하나인 오크풍미도 세월 따라 변하고 있다.
만약 와인을 마셨을 때 꿀 향, 바닐라 향, 아몬드 향, 구운 토스트 향, 헤이즐럿 향, 초콜렛 향 등의 아로마가 표현된다면 바로, 구운 오크 향이 와인에 잘 배어들었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그랑 뱅(Grand Vin)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점쳐보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모든 와인이 다 오크를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오크 향과 나무의 탄닌 성분을 감당할만한 파워 있는 와인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오크 향에 파묻혀 고유의 향을 잃었다거나 와인 성분의 구조가 튼튼하지 못해서 맛의 균형이 깨지고 탄닌 맛이 강한 경우다.
훌륭한 와인은 잘 무르익었을 때 더 이상 오크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톱밥 향이 난다거나 지나치게 탄닌의 떫고 거친 맛이 난다면 (와인과 오크의) 잘못된 만남의 결과다. 그뿐만 아니다. 와인양조업자로서는 만만치 않게 비용이 드는 오크통을 값싼 와인에 사용한다면 경제적 효과가 없다. 또한 오크통은 숙성 중간에 곰팡이가 필 수도 있는 위험부담도 있다. 그래서 생겨난 해결책은 새로운 재질을 사용하는 것이다. 가장 널리 쓰이는 건 스테인레스 스틸 통이다.
현대 와인 양조사의 커다란 획을 그었던 스테인레스 스틸 통은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반영구적일 뿐만 아니라 발효 온도 등을 자동 조절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위험부담도 적다. 특히 슈냉(Chenin), 리슬링(Riesling), 게뷔르츠트라미너(Gewürztraminer) 같은 화이트 품종의 와인은 그 자체만으로도 풍부한 과일 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스테인레스 스틸 통을 사용하게 되면 이런 장점을 잘 살려 과일 향이 강하고 상큼한 맛의 와인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가 남았다. 레드 와인과 샤르도네(Chardonnay) 같은 품종의 화이트 와인이 오크와 만났을 때 가져온 상승효과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애호가들은 오크에서 배어난 우아한 향과 맛의 매력을 떨쳐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아르헨티나, 칠레 그리고 호주 같은 와인 신생국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떡갈나무 조각이나 톱밥을 이용하고 있다. 와인양조업자들은 떡갈나무를 얇게 썬 조각이나 톱밥을 티백처럼 만들어 양조통에 담가 놓는다. 마치 차를 우려내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만든 와인은 오크 향이 나면서 나무의 탄닌 맛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이 방식은 어디까지나 오크통 효과를 흉내 내고 있을 뿐이다. 오크에 담아두어야 하는 본래의 목적을 무시한 채 부차적인 오크 향을 내는 데만 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와인을 오크통에 담아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크는 와인과 바깥 공기를 서로 소통시켜주는 필터역할을 해준다. 그래서 아주 섬세한 나무 결 사이로 통풍작용이 일고 몇 달 뒤에는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다. 맛은 깊고 풍부해지며 볼륨감을 갖게 되고 오크에서 비롯된 섬세하고 세련된 향은 와인 맛을 더해준다. 무엇보다 와인의 거칠었던 탄닌 맛이 외부와 접촉하면서 깊고 부드러워지는 것이다.
유럽의 양조업자들은 오크통에 담아 두는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오크통 뿐만 아니라 신세계에서는 널리 퍼져 있는 트릭들, 예를 들면 화학약품(DMDC등)이나 인공성분을 첨가하지 않은 채 포도밭 그대로의 맛을 와인에 담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들이 도덕적으로 순결해서라거나 철학적 이상이 높아서가 아니다(물론 그런 양조업자들도 많다). 정부가 법으로 규제해 놓았기 때문이다. 프랑스를 예로 들면 뱅 드 빼이(Vin de Pay)급 와인은 떡갈나무 조각을 사용할 수 있지만 AOC급 이상부터는 금지되어 있다. 전통국가들의 고민은 바로 이것. 양조 기술이 점점 발달하면서 와인 맛만 가지고는 신세계와 구세계의 경계가 모호해졌다는 것이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했을 때 오크통 출신인지 오크 조각 출신인지 전문가조차 구분하기 힘들다. 최근 들어서는 수족관의 기포제 같은 장치가 개발되면서(Micro Oxygenation) 오크통의 통풍효과도 비슷하게 재현해내고 있다고 한다. 그러자 유럽 와인들은 뉴월드에 질 수 없다는 듯 오크풍미의 향연을 펼치기 시작했다. 실제로 떡갈나무 조각을 사용한 AOC급 와인이 적발되는 사례가 있는가 하면 뉴오크 사용량을 늘리면서 품질, 스타일에 상관없이 커피, 모카, 초쿌렛 향으로 도포(塗布)되었다. 이를 두고 오크 풍미를 좋아하는 애호가들은 환영하는 반응을 보였지만 한편에서는 유럽와인의 개성이 사라지는 것 아닌가 우려가 커져갔다. 요즈음 음악은 파일로 저장 감상하기 때문에 CD도 잘 구매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최근 LP판이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LP판을 드라마와 영화로 접한 젊은 세대들은 LP판이 가진 아날로그 매력에 푹 빠지면서 인기가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최근 유럽 와인들은 오크 풍미를 자제하는 트렌드가 일고 있다. 뉴오크 사용을 절제하면서 오크 풍미보다는 자연스러운 과일 풍미를 드러내고 와인 자체의 맛을 살리려는 트렌드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정말 유행은 돌고 도나보다. |
WRITTEN BY 백은주 (Eunjoo Baik)
(경희대학교 관광대학원 와인, 워터, 티 소믈리에 전문가 과정 교수 / 부산 가톨릭대학교 와인 소믈리에 전문가 과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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