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최태호의 와인 한 잔] 내게서 멀어지는 것들
포도밭의 토양을 와인 한 잔으로 느낄 수 있을까? 식물은 생장에 적합한 환경의 범위를 벗어나도 생존할 수 있지만 최상의 풍미는 가장 적합한 토양에서 자랄 경우만 얻을 수 있다. 포도나무의 뿌리는 토양으로부터 수분과 미네랄을 끌어 올리는 역할을 한다. 척박한 토양에서 자라는 포도나무는 수분과 미네랄을 얻기 위해 뿌리를 깊게 내린다. 인생도 힘겨울수록 값진 보람을 안겨 주는 법이다. 하지만 토양이 너무 메마르면 수분 결핍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성장이 정체되고 관개해주지 않으면 포도의 풍미가 제대로 살아나지 못한다. 인생도 아픔만큼 행복한 구석이 있어야 살아갈 만하다.
이탈리아 부루넬로디몬탈치노 와인 중 유일하게 그리스방식으로 포도를 재배하는 티에치 와이너리.
이탈리아는 세계 최고의 와인생산 대국으로 과거 에노테리아라는 명칭에 걸맞게 오랜 역사를 가진 와인의 땅이다. 전 국토에서 와인이 생산되는 유일한 와인 생산국가로 수천 종의 토착 품종이 서로 다른 기후와 토양에 따라 다양한 와인으로 만들어진다. 이러한 다양성 때문에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와인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하지만 최고의 바롤로 생산자 로베르토 콘테르노의 말처럼 이탈리아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다양하고 평균적으로 질 높은 와인을 생산하는 나라다. 그들에게 가장 큰 일상의 즐거움은 와인을 마시며 요리에 관해 끝없이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라고 한다. 이탈리아 와인을 마시며 그들을 이해하고 이탈리아의 음식과 문화를 통해 그들의 와인을 이해할 수 있다.
이탈리아 와인의 중심 토스카나는 수많은 역사와 다양성, 백과사전이 될 만큼 많은 위대한 와인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지역을 지배하는 품종은 단 두 가지, 트레비아노와 산지오베제다. 산지오베제가 세계적으로 뛰어난 레드와인 품종 중 하나가 된 것과 달리 트레비아노는 여전히 많이 알려지지 않은 품종이다. 생산성이 좋으며 질병에 강하고 자연적인 산도가 높아 갈증을 해소하는 상쾌함을 가지고 있지만 한때 가벼운 화이트와인을 대량 생산했던 과거로 인해 피렌체의 트라토리아에서 편하게 마시는 와인이 되었다. 트레비아노의 정통성을 자랑으로 삼을 만한 와인으로 빈산토가 있다. 와인과 위스키의 중간쯤 되며 아몬드와 캐러멜 향이 나는 스위트와인으로 토스카나를 대표하는 와인이다. 하지만 빈산토에서 트레비아노는 말바시아를 받쳐주는 산도 높은 품종으로 귀결된다. 홀로 빛나는 와인은 아니지만 다른 품종과 브랜딩되면서 다양하게 변신하는 와인. 여전히 2인자로 존재하지만 없어서는 안 될 자리를 묵묵히 지켜내고 있다.
우리는 새 지식·정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처음 마음이나 다짐을 잊어버린다. 소중함을 알아채지 못하다가 없으면 가치를 깨닫는다. 절대로 놓지 않기로 다짐했던 감정이 과거를 벗어나면 모든 기억들은 거짓이 된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최근 감상한 영화 ‘다가오는 것들’은 다가오고 멀어지는 것들의 교차점에 선 한 여성의 이야기를 지적이면서 담담하게 그려낸다. 누구나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마주하는 상실을 경험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잃어야 모든 것을 상실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게서 멀어져 가는 것들 속에서 다가오는 것들의 세월, 그것이 굳이 행복이 아니어도 좋다. 일상 속에서 밀고 올라오는 것과 밀려가는 것의 잔향을 담담하게 느끼는 삶도 괜찮다. 온전히 자기 자신만의 다짐으로 마음을 돌려먹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달라질 것 없는 삶으로 변해버린다. 내게서 멀어지는 것들 때문에 아파하지 말자. 익숙함에서 멀어지는 것이 낯설지만 다가오는 것들에 대한 설렘을 즐겨보자.
더위를 잊게 해줄 프로세코 한잔이 그립다. 너무 많은 생각으로 머리를 썩이고 싶지 않을 때 제격인 와인이다.
최태호 부산가톨릭대 와인전문가과정 책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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