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최태호의 와인 한 잔] 처음이란 무엇인가? 조지아 와인
그리스어로 ‘처음’이라는 뜻을 가진 ‘arche’는 ‘일련의 사건의 시초’라는 개념으로 철학 용어로는 ‘원리(原理)’로 번역한다. 밤하늘 별들의 움직임과 정교하게 변하는 자연의 원리를 보면서 우주를 만든 시초에 의문을 품었던 인류는 기원신화에 신들의 창조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하지만 고고학과 지질학의 등장으로 신의 계시라고 신봉했던 최초의 역사는 수천 년 앞선 다른 문명들의 발견으로 여러 역사의 하나로 전락했다.
크베브리 안에서 숙성 중인 조지아 와인.
세계 최초의 기독교 공인 국가, 세계 최초의 와인 생산지로 ‘와인의 요람‘으로 불리는 조지아의 와인 양조 역사는 8000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포도나무의 꽃가루와 포도 씨라는 고고학적 생물학적 증거를 분석해보면 포도가 최초로 재배된 시기는 기원전 6000년에서 4000년 사이다. 조지아에서는 기원전6000년의 유물로 추정되는 양조용 품종의 씨앗이 발견됐다. 포도 재배의 시작으로 신석기 시대에는 더 많은 포도를 수확할 수 있었고 와인을 보관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도구인 토기가 등장했다. 점토로 그릇을 빚은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공기와의 접촉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 목이 좁은 항아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최초의 조지아 와인은 크베브리라는 레몬 모양의 대형 토기 항아리에 저장되었다. 보통 1~2t 정도의 크기인 크베브리는 ‘매장된 것’이라는 의미인 ‘크베우리(kveuri)’에서 유래되었으며 발효할 때 나는 열을 땅이 흡수해주기 때문에 자연적인 온도 조절이 가능하며 한번 땅 속에 묻으면 수백 년 간 그대로 쓸 수 있다.
조지아에서 크베브리는 와인 양조용 토기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크베브리는 어머니의 자궁을 닮았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나는 새 생명처럼 포도는 크베브리 안에서 껍질과 함께 침용 되어 점차 호박색으로 변하며 더욱 풍부한 향과 맛이 더해진다. 실제로 조지아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갓 만든 와인을 크베브리에 채워 그 아이가 결혼하는 날까지 보관하기도 하고 사람이 죽으면 크베브리 안에 시신을 넣어 땅에 묻기도 했다. 어머니 품에서 더욱 성숙해지는 인간처럼 조지아 사람들에게 크베브리는 하나의 세계이며 삶의 처음과 끝을 의미하는 상징이다.
와인의 역사상 지금처럼 인간의 역할이 강조된 적은 없다. 자연의 산물인지 인간의 작품인지 알 수 없는 모순의 역사를 가진 와인이지만 결국은 수많은 선택이 낳은 결과물이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Hermann Hesse, Demian(1919)의 첫 구절처럼 ‘나’를 찾아가는 길은 기존 규범과 결별하는 곳에서 시작한다. 와인의 역사는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만든 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다양한 역사를 통해 바라보아야 하는 대상이다.
사람의 인생도 와인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비슷하다. “새는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알에서 태어난 새가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것처럼 자기만의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 넓은 세계를 보아야 한다.
와인은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신이 내린 선물이지만 사탄의 유혹이 되기도 한다. 예절과 교양의 상징이면서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병폐이기도 하다. 건강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해로울 때도 있다. 가난한 사람도 부유한 권력층도 마실 수 있으며 싼 것도 있고 비싼 것도 있다. 이러한 복잡 미묘함 때문에 와인은 매력적이다.
최태호 부산가톨릭대 와인전문가과정 책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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