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최태호의 와인 한 잔] 유효기간
유럽연합은 2024년 수확 포도로 만든 와인부터 새로운 라벨 규제를 적용했다. 이 규정은 2021년 12월 유럽연합의 공동농업정책에서 채택되었으며, 2년 유예기간 동안 회원국 및 이해관계자 간 협의를 거친 후 2024년부터 시행됐다. 유럽의 새로운 와인 라벨 규제는 소비자에게 더 많은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려는 의도로 계획됐는데 그 중 유통기한 표기에 대한 새로운 규정이 흥미롭다. ‘일반적인 와인은 따로 유통기한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알콜도수가 낮아 장기 보관이 힘든 무알콜 또는 저알콜 와인은 유통기한을 반드시 라벨에 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통기한은 제품 제조부터 소비자에게 판매가 허용되는 기한이며, 유효기간은 식품을 섭취해도 건강이나 안전에 이상이 없을 것으로 인정되는 기한이다. 즉, 유통기한은 판매기한을 말하고 유효기간은 소비기한을 말한다.
유통기한이 없는 주정강화 와인, 포트와인을 만드는 포르투갈 도우로 강의 포도밭.
추억의 노래를 들으며 감상에 빠지는 것은 노래가 그리워서가 아니라 그 노래를 듣던 그 시절이 그리워서다. 사람 관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순간부터 다양한 관계가 형성되지만 모든 관계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누구나 만나면 헤어지는 것처럼 삶은 유효기간이 있다. 살다 보면 의도와 상관없이 상처를 주고받는다. 따져봤자 서로에게 깊게 베인 상처가 된다. 그들이 나를 떠나거나 배신해도 안타까워하지 말자. 유효기간이 끝난 약이나 음식을 버리듯이 그냥 폐기하면 된다.
많은 시간이 무색하리만큼 작은 이유로 어느 순간 관계가 끝나 버린다. 그동안 관계를 유지하던 에너지가 떨어지면 자연스럽게 서로 소홀해지고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겪는 고통이다. 인간은 이기적이므로 나를 보호해야 한다. 더 상처받지 않게 나를 지키고 소중한 내 시간과 감정 소모도 줄여야 한다.
반면, 나에게 소중한 사람과 소중한 것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것도 오히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과정이다. 세계적 가수 레이디 가가와 배우 호아킨 피닉스가 주연을 맡은 뮤지컬 영화 ‘조커:폴리 아 뒤’의 개봉 전 레이디 가가는 본인의 배역인 리 퀸젤에서 영감을 받은 앨범 ‘할리 퀸’을 공개했다. 세계적인 대중문화 잡지 ‘롤링스톤’과의 인터뷰에서 “촬영이 끝났지만 나는 아직 그녀와 헤어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추억과 감동적인 경험의 유효기간을 연장하는 그녀만의 특별한 방법이다.
최근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행지들이 관광객이 지나치게 몰리는 오버투어리즘 현상을 겪으면서 새롭고 낯선 지역으로 떠나는 여행 트렌드가 생겨나고 있다. 여행자들이 새로운 맛을 경험하고 그 맛에 얽힌 이야기를 발견하는데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는 미식 경험이 새로운 여행 중심이 되고 있다. 자칫 흥미를 잃을 수 있는 여행의 유효기간을 대체하는 새로운 트렌드가 만들어지고 있다.
“내가 사랑하지 않은 것은 나에게 진심으로 상처를줄 수가 없다. 내가 진짜로 원하고,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것만 나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정여울 인생 수업) 인생은 타이밍, 지나는 시간을 붙잡아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더 이상 내가 사랑하지 않는 것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아파하지 말자.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라 했다. 힘들거나 행복했던 지난 시간이 아름다운 것은 내가 사랑한 추억, 유효기간 없는 그 추억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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