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의 나이에 와인산업에 투신한 이유
<THE SCENT Columnist Interview>
“불혹의 나이에 와인산업에 투신한 이유”
THE SCENT_
웹진 <더 센트>의 와인칼럼 필진으로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와인업계에 발을 들여 놓으신 계기가 특별하다고 들었습니다.
이철형_
와인을 포함한 문화와 라이프 스타일을 새로이 디자인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편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웹진 <더 센트>가 오픈 되었다고 기고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참 기뻤습니다.
내가 불혹의 나이에 그것도 아직 와인 시장이 불모지였다시피 한 2000년도 3월에 한국 와인산업의 원조이고 와인업계 종사 경력으로 보아 나보다 10년 선배인 두 친구가 소매업 진출을 계획하면서
나를 동업자로 포섭(?)하기 위해 함께 저녁식사를 하던 때가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사실 당시 이미 두 친구가 만들어 놓은 수입회사와 수입주류 도매회사는 업계 1, 2위를 다툴 정도로
정상궤도에 진입해서 내가 필요한 상황도 아니어서 내 입장에서는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과 젓가락만 달랑 갖고 합류하는 꼴이었기 때문에 두 친구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앞섰지요.
물론 와인산업이 성장산업이고 영속적인 산업일 것이라는 기본적인 확신은 가졌습니다. 또한 노후에 퇴직하더라도 동네에 조그마한 ‘와인 사랑방’ 하나 차려놓고 임대료와
직원 한 명 정도의 월급만 나오면 되는 선에서 좋은 사람들과 저녁마다 즐거운 담소 나누는 공간을 만들어 놓으면 사실상 은퇴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아! 나 이 업종으로 이직해야겠다’라고 생각하게 한 것은 바로 만 40이라는 불혹의 나이에 친구가 내놓은 와인이 가져다 준 향기 때문입니다.
당시 나는 와인이라고는 마주앙과 진로 포도주, 집에서 어머님께서 담가주셨던 설탕이 듬뿍 들어간 달달한 엄마표 포도주 그리고 대형 마트에 가서 장보는 아내 따라다니기 싫어서 술 진열대 앞에서 얼쩡거리다가
어쩌다 사먹은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했던 진열대 제일 하단에 깔려있던 지푸라기로 싼 병의 와인이나 항아리처럼 큰 병에 담긴 미국 와인밖에 마셔본 경험이 없었습니다.
당시 와인은 늘 진열대 최 하단이나 바로 그 윗간에만 놓여있어서 쭈그리고 앉아야 와인을 고를 수 있을 정도로 시장이 거의 없었습니다. 스파클링 와인으로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베이커리에서 사먹고
그 다음날 머리 아파서 혼이 난 오스카 샴페인(사실은 샴페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마흔 넘어 와인 업계 근무하면서 입니다)이 그때까지 내가 마셔본 것의 전부였지요.
친구가 압구정 어느 레스토랑에서 내놓은 와인은 루이 라투르 알록스 코르통(Louis Latour Aloxe Corton) 1995년 빈티지였습니다. 사실 당시는 이름을 듣고 잊어버렸다가 나중에 와인 비즈니스에 합류해서 라벨을 보고 알았습니다.
친구가 이 와인을 내놓으면서 오픈 했을 때와 10분 후, 20분 후, 30분 후, 한 시간 후 등 시간이 흘러가면서 향과 맛의 변화를 느껴보라고 말했습니다.
변한다면서! 당시 나는 약 10년 가까이를 기계 제조회사와 환경재생 관련 기술회사에서 근무했었기 때문에 ‘아니 이 한 병에서 나오는 것이 시간대별로 맛과 향이 변한다면 그건 불량 아닌가?
정말 좋은 상품이라면 처음부터 시종일관 맛과 향이 최상이어야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지함과 무식함이 드러날까 봐 창피해서 말은 못하고 속으로만...
그리고 원래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내 세대가 대부분 그렇듯이 음식을 가려먹는다든가 특별히 맛있는 음식을 찾아 다닌다든가 하는 미식의 세계는 아예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속으로 그런 사람을 보면 참 배부른 소리 한다고 약간 냉소적으로 보아왔었죠. 그냥 때가 되면 허기를 때우는 정도로 한 10분만에 후다닥 먹고 놀거나 일하거나 하는 것이 일상생활이었죠.
즉 내 입맛이나 후각이라는 것도 무뎌져 있어서 그런 민감한 향들을 구별할 정도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신세계를 경험하게 된 것이죠. 친구들 덕분에!!! 물리적으로 같은 세대를 살고 있지만
문화적으로는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몸으로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아! 이런 세계가 있구나!’ 나처럼 감각이 무디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도 느낄 정도의 이 신비로운 세계!
그러고 보니 지금부터라도 와인의 세계에 입문하면 감각의 노후화를 예방할 것 같았습니다. 감각의 노후화가 예방되면 감성의 노후화도 예방될 것 같고…
그럼 나이 들면 완고해져서 듣게 되는 ‘꼰대’ 라는 소리를 안들을 것 같고^^. 그래서 그 다음날 친구들에게 끼워달라고 서둘러 부탁을 했습니다. 난 지금도 나를 받아준 친구들을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은인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THE SCENT_
영국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존 게이(John Gay, 1685 ~ 1732)는 “From wine what sudden friendship springs!”라는 명언을 남겼는데 대표님의 경우에는 역으로 우정을 통해서 와인의 세계로 연결이 되었네요. 우정에 어울리는 와인이 있을까요?
이철형_
우정은 둘 또는 그 이상의 품격이 고매하여야 하고 서로에게 겸손해야 지속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과 같은 세 종류의 와인을 우정과 어울리는 와인으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오퍼스 원(Opus one) : 미국의 컬트 와인의 원조격인 와인으로 프랑스의 그랑크뤼 메이커인 바롱 필립 드 로칠드사(Baron Philippe de Rothschild S. A.)와 미국의 와인 대부 로버트 몬다비(Robert Mondavi)의 합작품입니다
라벨에 두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데 합작 당시 나이가 조금 더 많았던 필립 드 로칠드(Philippe de Rothschild) 남작이 약간 위에 위치하도록 도안되어 있습니다.
양 국가 최고의 와인 메이커의 합작품이면서도 예의를 취하는 모습이 나이를 초월한 우정에서 겸손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지금은 둘 다 고인이 되었고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는 펀드에 매각되었지만 양사가 여전히 1년씩 번갈아 가면서 관리하면서 와인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프리마크 아비 (Freemark Abbey) : 1976년 파리의 심판이 열릴 때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유일하게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 두 종류 모두를 출품할 정도로 일찍이 고급 와인을 생산한 와이너리입니다.
그런데 이 와이너리 명칭만 보면 무슨 수도원 같지만 사실은 1939년 와이너리 소유자였던 Charles Freeman, Markquand Foster, Abbey Ahern 이 세 명의 이름을 따서 만든 브랜드이자 와이너리 명칭입니다.
이 와이너리는 1967년에 7명의 파트너들이 구매하여 당시에 ‘프리마크 대학(The University of Freemark)’이라고 불릴 정도로 혁신적인 운영을 해나갑니다.
그래서 급기야 1976년도에 파리의 심판에 유일하게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을 출품할 정도로 성장합니다. 지금은 미국 프리미엄 와인의 대부인 캔달 잭슨을 생산하는 잭슨 패밀리사가 소유하고 있습니다.
알마비바(Almaviva) : 샤토 무통 로칠드를 생산하는 바롱 필립 드 로칠드사가 칠레 최대의 와이너리 콘챠이토로(Concha y Toro) 사와 합작하여 칠레에서 만든 명품와인입니다.
이 역시 프랑스와 칠레 최고의 만남으로 이루어져서 칠레 와인도 고급 와인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세계에 알린 와인입니다. 이 와인이 한국의 와인시장 성장 초기에 너무 유명해지다 보니
아직까지도 대형할인점 행사가 기준으로 보면 세계에서 가장 저렴하게 판매되어 한국 소비자들에게는 가격 체계가 흐트러진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세계적으로는 여전히 명품와인으로 판매되고 있습니다.
THE SCENT_
와인산업에 투신하게 된 독특한 배경을 바탕으로 <더 센트>의 독자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이철형_
와인의 향과 맛의 세계는 결국 또 다른 세계,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맛있는 것을 즐기는 미식의 세계로 까지 나를 끌고 갔습니다.
나는 와인을 통해 ‘문화 교양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모르고 죽었을 수도 있는 새로운 감각과 맛과 향의 세계를 알았고 덕분에 소주와 양주와 폭탄주의 세계를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도 와인을 마시면서 이렇게 개화되었으니 보다 많은 분들이 <더 센트>라는 웹진을 통해 즐겁고 신나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 문화와 와인의 세계를 접해보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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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나라 대표 이철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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