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의 와인

2021.05.03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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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와인 


크리스마스 시즌과 겹쳐 동방박사 얘기하다 보니 와인의 동방 진출을 먼저 언급한 셈이지만, 사실 와인을 얘기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지역이 그리스이기도 하다. 인류 문명, 그것도 서양 세계를 얘기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고는 하는 지역이 이 지역이기도 하다. 지구상의 인류 문화를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고대 그리스 문명의 은총을 받은 지역, 그러한 은총에 대항하고 경쟁한 지역, 그리고 이러한 두 세계와는 전혀 무관한 제3세계로 구분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현대 세계를 이끌어 가는 영어권 국가들이 자신들의 정서적, 사상적, 문화적 원류를 그리스에서 찾는 것은(물론 그리스는 별로 인정 안 하겠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그래서 500년 가까이 이슬람 지배권에 있었고 정치적, 경제적으로 여러 차례 부침을 겪은 그리스를 EU가 끝까지 끌고 가려고 노력하는 이유도 바로 국가적인 장유유서와 경로사상에서 우러나는 분위기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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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와인 산지 (지역명은 독일어 표기, 사진 제공: Wikipedia)/ 



그리스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지리적 특성이다. 아마도 대한민국 사람 중에 그리스의 국가 강역과 그 형태를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텐데, 그 이유는 바로 통상적으로 발로 밟고 서는 땅의 개념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수많은 섬으로 둘러 싸인 에개해와 이오니아해라는 바다를 그리스의 주요한 영토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비옥한 농토가 존재하는 곳도 아니고 또한 경관이 확실하게 시야에 들어 오는 광활한 대륙도 아닌 그리스 일대에서 유럽 고대 문명이 싹트게 된 이유는 바로 이렇게 사람 사는 곳마다 구석구석 존재하는 바다 때문이다. 고대 문명에서 중요한 개념은 생존에 필요한 재화의 생산과 재분배이고, 이를 통한 계급의 형성 및 지배층 이데올로기의 파급이다. 하지만 그리스에서는 재화의 생산보다는 재분배가 더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산업혁명 이전에 물류의 가장 신속한 유통은 바로 수로 혹은 해운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프랑스 파리에서 남부의 마르세이유까지 이동하려면 마차로 이동할 경우 19세기까지만 해도 무려 20일이 소요되는 장거리였다. 하지만 파리에서 센느 강을 통해 대서양으로 진입한 후 지브롤터를 통과해서 지중해로 진입하면 당시의 항해술로는 불과 일주일이면 충분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해운의 중요함은 그리스와 같은 지역이 생산 단계를 거치지 않은 재화의 집중과 재분배의 주요 허브로 성장하는 요인이기도 하며, 당연히 인구의 집중 및 이러한 인구를 통합하고 규제할 수 있는 다양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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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아티카 토기에 묘사 된 심포지움 장면/ 



현재까지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그리스의 와인 생산은 대략 6000년전까지 올라간다. 그리고 이 시기는 바로 코카서스 지방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 된 와인 생산의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와인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숭배하고, 발달한 항해 해운술을 통해 다양한 지역으로 와인을 확산한 그리스는 와인이 지금처럼 애호되고 향유되는 문화적 매체로 자리잡은 최초의 지역에 해당한다. 무엇보다도 상업, 문자, 항해술, 신화, 철학적 사유 등과 같은 다양한 문명 요소들이 ‘토탈팩키지’로 신속하게 파급되는 에개해 일대에서, 와인은 이전의 단순한 갈증 해소용 음료가 아닌 진정한 부가 가치를 가진 고대의 중요한 문화 콘텐츠였던 것이다. 흔히 알려진 단어인 ‘심포지움(symposium)’은 ‘함께 테이블에서 술을 마신다’라는 의미의 고대 그리스어에서 기원한 것으로 와인이 가져다 주는 다양한 네트워크, 그리고 학술적 토론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스에서 생산되고 파급되는 와인은 지중해 동쪽에서 서쪽 끝까지 끊임없이 유통되었으며, 신속한 해운의 도움으로 인하여 어느 지역에서든지 맛과 향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향유될 수 있었다. 당연히 보다 더 뛰어난 맛과 향을 개발하기 위한 다양한 양조 방법과 보존 방법도 발달할 수 밖에 없었고, 에개해 일대 난입하던 그리스의 다양한 도시 국가에서는 서로 간에 경쟁적인 방식으로 와인을 개발하고 이를 유포하였던 것이다. 기술의 발전에 있어서 가장 큰 원동력이 경쟁과 수요 공급의 불균형이라면 그리스는 이미 고대 단계에 와인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중요한 펀더멘탈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이엔드 급으로 생산된 와인을 주요 매체로 해서 그리스의 도시 국가는 강력한 상업 자본에 기반한 독립 국가를 유지하고 지중해 일대에 주요 식민지를 건설함은 물론, 동방의 페르시아 제국과도 연합해서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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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대 고고학과 학생들과 방문한 산토리니섬의 와인샵. 화산섬의 특성 상 “Save water, drink wine”이라는 문구가 곳곳에 붙어 있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가진 그리스의 와인은 그 이후 문명의 중심지가 서쪽으로 이동하고, 오랜 기간 동안 이슬람 세력의 지배에 놓이면서 침체기를 거치게 된다. 현재 그리스의 와인 사업은 상대적으로 열악한 농업 환경 및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수적인 요소인 대량 생산의 불가능으로 인하여 국제 시장에서 그다지 큰 파급력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대신 지금은 거의 사장 된 고대 포도종을 활용한 독특한 와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예를 들면 중동에서 기원한 아시리티코(Assyrtiko) 종 같은 경우 리슬링의 먼 방계 조상에 해당하며, 전 유럽이 겪은 필록세라 병을 이겨 낸 그리스 토착종이기도 하다. 1960년 들어서 국내의 정치적 안정기를 겪은 후 본격적인 국가 주도의 와인 생산이 이루어지면서 레치나(Retsina)와 같이 송진을 가미한 와인, 글로벌 품종과 그리스 토종을 혼합한 다양한 실험 양조가 이루어지면서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매니아적 상품으로 차츰 인식 되어가고 있다. 관광지로 유명한 산토리니 섬의 와인 같은 경우 산토리니 섬 바깥에서는 거의 찾기 힘들다는 이유로 인하여 컬트 와인의 대열에 들기도 한다. 최근에는 의식 있는 젊은 와이너리 소유주들의 노력으로 인하여 고대 그리스의 와인 양조법을 직접 발굴해서 현대적으로 응용하는 방법이 고안되기도 하였다.

오랜 기간 동안 지중해의 맹주로 군림하면서 곳곳에 와인과 문명을 전파하고 식민지를 건설하던 그리스의 막대한 영향력은, 그 후 등장한 이태리, 프랑스, 독일 등에게 와인 사업의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 마치 그들이 숭배하던 운명의 여신인 티케(Tyche, Τύχη)가 주관한 것처럼, 역사적 인과응보를 스스로 담담히 받아들인 셈이다. 1821년 터키에서 서방 열강의 도움으로 간신히 독립에 성공한 그리스는 그 후 양차 세계 대전과 국내의 열악한 정치적 상황 및 발칸 반도 지역의 국제적 분쟁, 그리고 최근의 IMF 사태까지 맞이하면서 좀처럼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흥망성쇠를 몸소 체험하고, 어떤 상황에도 새옹지마처럼 받아들이는 여유를 스스로 터득하게 된 그리스 사람들은 그들이 섬겨 온 다양한 신들만큼이나 인간사와 세상사를 모두 포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처럼 지금도 의연하고 점잖게 서양 세계의 정신적 좌장 노릇을 하고 있다. 신과 인간의 경계에서 몸부림 치면서 푸르디 푸른 에개해를 바라 봐 온 그들의 역사는 그들이 전파하고 확산시킨 와인과 함께 앞으로도 더욱 더 숙성될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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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유용욱 (Yongwook Yoo)
충남대학교 고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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