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무거운 와인 병을 사용하는 진짜 이유
누군가 그러더군요. 은행에 대출받으러 갈 때 또는 투자가로부터 자금을 얻어내야 할 때는 본인이 가진 것 중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고 제일 비싼 시계와 구두를 착용해야 한다고요. 그래야 목적을 쉽게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빈 병인데도 마치 와인이 가득 채워져 있는 것 같이 무거운 와인 병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750ml 사이즈의 와인 병보다 훨씬 덩치가 커서 마치 더 많은 양의 와인이 채워져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라벨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 또한 750ml이죠.
무겁고 큰 와인 병, 이른바 '헤비 바틀(Heavy Bottle)'을 사용하는 와인이 최근에 대유행입니다. 소비자들에게 인기가 높아요. 사실 10년쯤 전에는 이런 와인 병을 사용한 와인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초 고가의 미국 컬트 와인이나 남미의 플래그쉽 와인들에서 간혹 보이곤 했었지만 유럽 산 와인에는 정말 찾아보기 힘들었죠. 그러나 대략 5~6년 전부터 헤비 바틀을 사용한 와인이 눈에 띄게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은 2~3만원대의 유럽 와인에서도 이런 헤비 바틀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헤비 바틀은 고급 명품 와인의 필수 조건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헤비 바틀은 보통 와인 병에 비해 더 깊은 펀트(Punt - 와인 병 바닥에 움푹 들어간 공간)를 제공합니다. 이것은 확실히 고급품일 것 같은 느낌을 주지요. 많은 분들이 펀트가 있는 와인이 고급 와인이고 깊이가 깊을수록 고급품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펀트는 와인 병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아이덴티티이죠. 다른 술이나 음료 또는 거의 모든 유리병에는 펀트를 찾아볼 수 없지만 와인을 담는 병은 대부분 펀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펀트가 없는 와인도 있죠. 전통적으로 독일과 알자스의 와인은 펀트가 없는 병을 사용합니다. 일종의 예외라 할 수 있겠네요. 그렇지만 헤비 바틀은 독일과 알자스의 와인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처음 미국을 포함한 신대륙 와인들이 세계의 와인 시장에서 좀 더 주목받기 위한 마케팅적인 요소였던 것 같습니다.
무거운 와인 병을 사용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능적으로는 좀 더 튼튼하고 외부의 충격에 강합니다. 직사광선은 물론 자외선 차단에도 더 도움이 돼요. 장기 숙성에도 유리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사용하는 진짜 이유는 고급스러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헤비 바틀은 장점보다 단점이 많습니다. 일단 무거워서 와인을 옮길 때나 식탁에서 서브할 때 손목과 팔에 상당히 많은 힘이 들어갑니다. 오십견으로 고통받는 필자 같은 사람들에게는 와인 서브하기가 아주 힘들죠. 또한 무겁고 크기 때문에 운송 과정에서도 더 많은 연료와 자원을 사용해야 합니다. 특히 창고와 컨테이너의 공간을 더 필요로 하고, 병의 제조 과정에서도 더 많은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와인 생산자들에게는 병 값도 만만치 않습니다. 소비자들이 일반적으로 간과하는 것은, 와인의 제조 비용에 있어서 포장에 들어가는 원가가 생각보다 높다는 점입니다. 헤비 바틀은 표준 와인 병에 비해 3배 이상 비싼 것도 있습니다. 또한 매장에서 진열을 할 때나 구매한 와인을 와인 셀러에 넣을 때 헤비 바틀은 표준 바틀에 비해서 애매하게 크기 때문에 어색하게 들어갑니다. 공간 효율성도 떨어지며 가뜩이나 비좁은 와인 셀러에 몇 병 들어 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와인 샵은 헤비 바틀 진열을 위한 별도의 와인 랙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전부 와인의 원가와 유통 비용에 반영된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죠.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헤비 바틀이 장기 숙성에 유리하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습니다만 이것은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고 하는 보르도와 부르고뉴의 수십년 이상 묵은 특급 와인들은 모두 표준 와인 병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호주에서 가장 비싼 와인 중 하나인 Penfolds社의 Grange도 표준 보르도 와인 병을 채용하고 있죠. Shafer Hillside Select처럼 명품 와인을 헤비 바틀에 병입할 수는 있지만 모든 명품 와인들이 헤비 바틀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죠.
진짜로 헤비 바틀을 사용해야하는 와인은 샴페인을 비롯한 고품질의 스파클링 와인 뿐입니다. 이것들의 내부에는 5~6기압 이상의 탄산이 가득 차 있어서 두께가 얇고 가느다란 표준 와인 병을 쓰면 가스의 압력에 의한 폭발 위험이 있기 때문이죠.
육중하고 무게감 있는 헤비 바틀에 담긴 와인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거기 담겨있는 와인도 진하고 묵직한 풀바디 와인일 것 같습니다. 헤비 바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근육질의 매력은 필자도 마음 깊이 인정하는 부분이지만, 셀러에 적재할 때만큼은 말할 수 없는 갑갑함이 밀려들곤 하죠. 아르마니 수트에 에르메스 넥타이, IWC 오토메틱 시계를 차고 테스토니 구두를 신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과연 그는 수백억의 자산가일까요?
P.S. 그러나 진실을 고백하건데, 저도 실은 헤비 바틀 와인을 좋아합니다. 아아, 이 인간의 간사함이란……
WRITTEN BY 박경태 이사 (winescope12@gmail.com)
Winescope Director, Wine YouTu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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