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철의 와인용 포도재배는 향미 농사
와인용 포도재배는 향미 농사
우리가 먹고 마실 때, 대부분은 코로 들이쉬면서 느끼는 것을 냄새라고 하며, 입안에서 코로 전달되어 느끼는 것을 맛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것도 냄새다. 이것을 입에서 느끼는 냄새라고 구분할 수 있는데, 옥스퍼드 사전에는 이것을 ‘향미(Flavor)’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향미는 후각의 도움을 받아서 느끼는 물질의 맛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맛이란 혀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고 코에서 느끼는 것이다. 와인 역시 0.1%도 안 되는 성분의 향이 후각을 지배하면서 맛을 좌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고급 와인 생산을 위한 포도재배는 ‘향미의 농사’라고 묘사되고 있다.
야생에 가깝게 재배해야
포도 향이 좋아야 와인 향이 좋아진다. 향이 좋은 포도를 얻으려면 어떻게 재배해야 할까? 야생상태 가깝게 재배해야 한다. 들에 나가서 캐낸 냉이와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한 냉이의 향은 열 배 이상 차이가 난다. 와인용 포도는 옛날부터 기름진 토양에 심지 않았다. 왜냐면 서양 사람들도 기름진 땅에는 밀을 심어서 주식을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도는 놀고 있는 언덕배기의 거칠고 메마른 토양에 심을 수밖에 없었고, 포도나무는 이런 토양에서 살기 위해 땅 속 깊이 뿌리를 뻗어 저 밑에 있는 수분과 양분을 악착같이 빨아들이면서, 수천 년 동안 이렇게 적응되어 온 것이다. 이렇게 해서 와인용 포도는 자연스럽게 야생에 가깝게 재배될 수밖에 없었다. 식용포도와는 차원이 다른 재배방법이다.
식용 포도와는 차원이 다르다
여유가 있어서 와인용 포도를 기름진 토양에서 재배를 하면, 나무는 왕성하게 뻗어나가고 열매도 커지지만, 당도가 떨어지고, 와인의 향을 좌우하는 미량성분이 부족하여 식용으로는 좋겠지만, 고급 와인을 만드는 데는 부적합한 포도가 열리게 된다. 우리나라 식용 포도의 당도는 13-15%인데 반해, 와인용 포도의 당도는 20-25%가 나온다. 식용 포도가 너무 달면 질려서 한 송이도 못 먹고 남기게 된다. 식용으로는 우리나라 포도가 가장 좋다. 또, 단위면적 당 생산량도 많은 차이가 난다. 고급 와인용 포도는 1 정보(ha)에서 5,000-6,000㎏을 생산하지만, 우리 식용 포도는 같은 면적에서 30,000㎏을 생산해야 농사를 잘 지었다는 소리를 듣는다. 게다가 유럽의 고급 와인산지에서는 단위면적 당 생산량을 얼마 이하로 규제하고 있다. 이렇게 와인용 포도와 식용 포도는 그 목적이 다른 만큼 재배방법이 다르다.
테루아르(Terroir)
만약 여러 가지 조건이 좋지 않아, 포도의 당도가 낮으면 그만큼을 설탕으로 보충하고, 신맛이 많으면 중화제를 넣어야 한다. 그러나 인위적인 조작이 원래의 포도성분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토질이나 기후조건이 양호한 곳에서 양질의 와인이 나올 수밖에 없다. 포도가 나쁘면 비용과 노력이 더 들어가면서도 와인은 맛이 없어진다. 이렇게 포도는 와인 그 자체의 품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는 ‘테루아르(Terroir)’라는 단어 하나로 포도밭의 모든 것을 이야기해 버린다. 테루아르는 와인 마니아들이 가장 즐겨 쓰는 단어로서 토양, 지형, 기후 등의 제반 요소의 상호 작용을 뜻하는데, 유럽 언어에서 ‘terr’이란 땅이나 흙을 의미하듯이,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테루아르’란 ‘촌스럽다’ 혹은 ‘토속적이다’라는 약간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20세기 언제부터인가 긍정적인 뜻으로 바뀌어 와인의 특성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는 이를 기초로 원산지 명칭을 관리하고 와인의 등급을 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유럽에서는 토양의 성질과 기후가 와인의 품질을 좌우한다는 믿음이 강할 수밖에 없다. 즉, 테루아르가 좋은 포도밭은 가만히 두어도 와인용으로 좋은 포도가 열리는데, 테루아르가 나쁘면 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포도를 생산할 수 없다는 말이다.
포도의 한 해 살이
포도는 4월이 되면 움이 트기 시작한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핑크 빛 움이 터지면서 잎과 꽃대가 형성되는데, 이 때 서리가 내리면 치명타를 입는다. 말 그대로 싹수가 노랗게 되는 것이다. 이 서리를 방지하기 위해서 포도밭에 난로를 설치하거나 풍차를 돌려서 바람을 순환시키는 것이다. ‘구름 속의 산책’이란 영화를 보면 봄에 서리를 방지하고자 난로를 지피다가 포도밭을 태워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 늦서리 방지다. 포도밭 위에 자갈이 많으면 이 자갈은 낮에 햇볕을 받아 뜨거워졌다가 밤에 그 열기를 발산하기 때문에 서리 방지에 큰 도움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늦서리 피해가 거의 없지만, 일교차가 심한 포도산지에서는 그만큼 포도밭의 위치와 토양이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5월이 되면 잎과 넝쿨이 활기차게 뻗고, 6월에는 꽃이 피고 이윽고 조그만 열매가 달린다. 푸른 열매는 점점 커지기 시작하고, 8월부터는 열매가 부드러워지고 슬슬 색깔이 변하면서 익어 가는데, 이때부터 수확할 때까지는 비가 아예 안 오는 것이 좋다. 릴케의 시처럼 ‘남국의 햇볕’이 이틀이라도 아쉬울 때다. 포도가 익을 무렵은 햇볕은 뜨겁고 바람은 시원하며 고추잠자리가 왔다 갔다 하는 분위기를 떠올리면 된다. 꽃이 피고 백일이 되면 수확을 하는데 꼭 정해진 것은 아니다. 포도의 성숙도는 와인의 품질과 타입을 결정짓는 요소가 되기 때문에 수확 시기는 경험적으로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와인을 잘 만드는 사람은 포도의 성숙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과일 예찬론
인간은 물과 소금을 제외하고는 살아있는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명체를 죽여서 먹는다. 살려고 발버둥치는 동물을 죽여서 맛있게 먹는 동물성 식품은 말할 것도 없고, 배추나 시금치 같은 식물성 식품도 생명체를 통째로 먹어 치우고, 쌀이나 보리도 살아있는 어린 생명체를 먹는 셈이다. 그러나 예외가 두 가지 있다. 자기 새끼를 먹이기 위해 내놓는 ‘젖’과 과수가 씨를 퍼뜨리기 위해서 내놓는 ‘과일’이다. 그러니까 영양학적인 측면을 떠나서 우유나 과일 등은 우리가 섭취할 때, 그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살려주는 식품이라고 할 수 있다.
포도를 비롯한 과일은 “나를 먹어주세요!” 외치고 있는 셈이다. 과일은 식물이 자기 씨를 널리 퍼뜨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씨가 여물지 않았을 때의 과일은 알맹이가 작고 단단하고, 시고 쓴맛을 가득 넣어서 동물들이 먹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고, 그것도 안심이 안 되어 잎과 똑같은 보호색을 띠고 있다. 그러나 씨가 여물어 가면, 알맹이가 커지면서 부드러워지고, 적절한 신맛에 단맛을 가득 넣어 주고, 향까지 풍기면서 동물을 유혹하면서, 동물들 눈에 쉽게 띄도록 갖가지 색깔로 치장도 한다. 동물들은 이 과일을 먹고 씨만 멀리 뱉어주면 된다. 그러면 과수가 원하는 종족번식의 목적은 달성되고, 동물은 맛있고 배부르니 이렇게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 아마도 에덴동산이 이런 과일로 꽉 차있는 곳이 아니었을까 싶다.
WRITTEN BY 김준철 (Jun Cheol Kim)
(한국와인협회 회장, 김준철와인스쿨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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