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철의 우리나라 와인
우리나라 포도는 없다
세계적으로 포도는 주로 와인을 만드는 ‘유럽포도’, 식용인 ‘미국포도’ 그리고 우리가 ‘머루’라고 부르는 ‘아시아포도’, 이렇게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유럽포도가 동양으로 흘러 들어온 것은 한나라 때(기원전 128년) 장건이 서역에서 포도나무 씨를 들여와서 심었다는 기록이 최초의 것이다. 그래서 중국과 일본에서는 유럽포도가 자라고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유럽포도가 존재하지 않으니,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들어오지 않은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니까 신사임당 그림에 나오는 포도가 어떤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옛날에 와인을 마신 사람들
기록상으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와인을 마신 사람은 고려 때 충렬왕 11년(1285년)으로, 원제가 고려의 왕에게 와인을 계속 보내왔는데, 이 와인은 정통 과실주 양조법으로 담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냐면 몽골은 헝가리를 비롯한 유럽까지 정복하여 그 와인을 가져올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동의보감』, 『지봉유설』 등에도 와인을 소개하고 있지만, 주로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으로 유입된 것을 간접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인조 14년(1636년) 대일통신부사 김세렴의 『해사록(海笑錄)』에 서구식 레드 와인을 대마도에서 대마도주와 대좌하면서 마셨다는 기록이 있으며, 1653년 네덜란드 하멜이 일본을 가는 도중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난파(하멜표류기)하여 가져왔던 레드 와인을 지방관에게 상납했다고 한다. 이후, 고종 3년(1866년), 5년 독일인 오펠트가 쇄국정책을 뚫고 레드 와인을 반입하였는데, 이때는 와인뿐 아니라 샴페인 및 양주도 도입하였다.
우리나라 와인의 시작
해방 후 우리나라의 와인은 1969년 애플와인 ‘파라다이스’가 나오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는 포도주스와 주정을 섞어서 만든 값싼 과실주가 있을 뿐이었고, 값비싼 과일을 100 % 함유한 술을 만든다는 발상 자체가 나오기 힘든 때였지만, 경양식 붐과 더불어 대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면서 우리나라도 과실주가 될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정부에서도 식량부족을 이유로 쌀로 만든 술보다는 과일로 만든 술을 장려하였기 때문에 대기업이 참여하면서, 1974년에는 제과업체인 해태에서 ‘노블와인’이라는 최초의 포도로 만든 와인이 출시되었고, 1977년 맥주업체인 OB는 지금까지도 그 이름이 남아있는 ‘마주앙’을 내놓아 와인이 대중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진로의 ‘샤토 몽블르’, 금복주의 ‘두리랑’, 대선주조의 ‘그랑주아’ 등이 나오면서 우리나라 와인제조의 전성시대를 구가하게 된다.
1980년대는 매년 10-30 %씩 와인시장이 성장하면서 1988년 최고의 성장을 기록하지만, 미처 우리 풍토에 맞는 품종을 개발하거나, 양조기술을 확립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외국산 와인이 수입되면서 국산 와인은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대기업이 주도하여 일으킨 와인시장이지만, 이들은 와인에 대한 뚜렷한 철학이나 장기적인 비전을 생각하지도 않고, 제조원가를 따져서 수익성이 없는 품목은 과감하게 정리하다 보니까 하나 둘 슬슬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것이다.
국산 와인의 부활
한 나라에서 생산되는 과일의 가공 비율은 그 나라 농민에게 아주 중요하다. 식용 과일이란 약간의 흠이라도 있으면 시장에서는 불합격품이기 때문에 농민들은 겉모양이 좋은 것은 식용으로, 약간 흠이 있는 것은 가공용으로 분류하여 공장으로 보내면 되는데, 받아줄 공장이 없다면 모양 나쁜 과일은 버려야 한다. 유럽의 경우 70 % 이상의 과일이 가공용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1 %도 안 된다. 이렇게 남아도는 과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가 대기업이 포기한 와인생산을 자치단체와 생산 농가의 자구책으로 다시 일으키고 있다. 정부에서도 ‘지역특산주’라는 이름으로 허가도 쉽게 내주고, 지원도 잘 해주는 모양이지만, 수많은 문제점을 안은 채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전문 지식의 부족
우리나라의 와인메이커는 남다른 정렬과 패기를 가지고 열심히 하지만, 양조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이 많지 않다. 나름대로 연구와 외국연수 등을 통하여 자체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기초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와인을 만들고 있는지 의아스럽게 생각될 때가 많다. 원하는 성격과 품질을 가진 와인을 만들려면 포도가 어떻게 자라고, 환경과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와인 생산의 생물학적 화학적인 역할에 대한 상당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1980년대 우리나라 와인의 전성기 때는 대기업이 주도하여 와인양조회사를 차리고, 대학에서 식품이나 화학을 전공하고 외국에서 양조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와인을 만들었어도, 수입 개방 후 오래 버티지 못하고 모두들 사라졌는데, 하물며 그 때보다 사정이 더 나아진 것도 없는데, 전문지식보다는 의욕과 지원만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취미로 와인을 만들고 즐긴다면 양조에 대한 전문지식까지 필요가 없겠지만, 상업적인 와인의 생산에는 전문지식이 필요하다. 대학을 비롯한 기술 단체와 컨설팅도 좋지만, 먼저 자신의 양조지식을 갖춰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게다가 그 동안 수많은 농가를 대상으로 진행되었던 와인제조 기술 컨설팅과 교육은 현장 생산 경험이 전혀 없는 대학 교수들의 이론 강의와 양조와 무관한 유관 단체 등의 형식적인 교육으로, 실질적인 효과는 거두지 못하고 시간과 예산만 낭비했던 것이 현실이다. 컨설팅과 교육은 상업적인 생산 및 품질관리에 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전문가의 교육과 실습으로 진행해야 한다. 그래야 가려운 부분을 정확히 알고 꼭 집어서 알려 주고, 풍부한 경험을 전달할 수 있다.
<롯데주류가 국내 최장수 와인 브랜드 마주앙의 40주년을 기념하는 리키티드 에디션(3,000병) ‘마주앙 시그니처 코리아 프리미을’을 지난 11월에 출시했다. 영천에서 재배된 Muscal Bailey A 품종의 포도만을 사용해서 100% 오크통 숙성 과정을 거쳤다.>
해결책은 장기적인 안목
좋은 와인이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경험을 쌓아야 제대로 된 와인이 나온다. 김치 담그는 법을 배웠다고 당장 맛있는 김치를 담글 수 없듯이 좋은 와인이 나오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이 시간을 버틸 수 있는 것이 자금이며, 그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것이 전문지식이다. 가장 어려운 문제이겠지만, 당장의 이익을 접어두고 장기간 우리 와인을 위해 투자를 과감하게 할 수 있는 투자자가 필요하다. 장기적인 안목과 철학을 가진 투자자와 우리 실정에 맞는 와인을 만들겠다는 뚜렷한 의지가 있는 와인메이커가 만나야 우리 와인의 장래를 보장할 수 있다. 국산 와인이 맛있고 값이 싸다면 누가 외면하겠는가? 국내 와인메이커는 이 점을 가장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WRITTEN BY 김준철 (Jun Cheol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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