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철의 와인 맛을 알아맞힌다고?
와인 맛을 알아맞힌다고?
“와인의 맛, 시가, 시, 산문 등에 대한 기준은 없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취향이 기준이며, 대다수의 의견이라도 어떤 사람에게 결정적인 것은 아니며, 그 사람 고유의 판단 기준에 지극히 적은 정도라도 영향을 끼칠 수는 없다.” <마크 트웨인, 1895>
007 제임스 본드
50년 이상 시리즈로 나오는 영화 007의 ‘제임스 본드’는 다방면으로 유능하지만, 와인에 대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킬러가 웨이터로 변장하고 레스토랑에 있는 제임스 본드에게 접근한다. “무통 로트쉴드 1955년 산입니다.”라고 말하는데, 본드는 무언가 수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음식에는 클라렛이 더 어울리는데…”라고 하니까, 웨이터는 “물론 그렇지요. 마침 클라렛이 떨어져서…” 이 때 본드는 “이 사람아, 무통이 바로 클라렛이야!”라고 하면서 킬러를 바닷물에 내 동이 친다. 와인에 대한 지식이 없던 웨이터로 변장한 킬러는 본드 앞에서 금방 들통이 난다.
또한 제임스 본드는 대상 인물과 와인을 마시면서 연도까지 알아맞히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007은 국가 공무원으로서 국민의 세금으로 자기 돈 안들이고 얼마든지 고급 와인의 맛을 익힐 수 있다. 세계 와인 중에서 아주 유명한 몇 가지만 연습했을 것이고, 사전에 그 사람이 어떤 와인을 즐겨 마신다는 정보는 알고 접근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와인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제임스 본드와 같이 될 수는 없다. 그만큼 와인이 사교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많이 알면 알수록 유리한 경지에 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오락 영화를 통하여 보여준 것이다.
신이 아닌 이상 불가능
이런 식으로 어떤 와인 맛을 보고, 어느 지방, 몇 년도, 무슨 와인이라고 알아맞히는 정도의 경지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할까? 천만에! 만약 우리가 하루에 10개씩 맛을 보고 그 맛을 외운다고 가정할 때, 1년이 지나면 3,650개의 와인 맛을 기억할 수 있다. 그리고 나면 해가 바뀌어 또 다른 연도의 동일한 이름의 와인이 3,650개가 또 나오기 때문에 평생을 아무리 노력해도 3,650개 와인만 맛보다가 그르치게 된다. 프랑스 보르도 지방에만 12,000여 개의 메이커가 있다.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평생 동안 보르도 와인의 절반도 맛을 볼 수 없다는 계산이 나온다. 수학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면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한번 맛을 보고 몇 년도 산 무슨 와인이라고 맞히는 장면은 어떻게 된 것일까? 이때는 미리 그 범위를 정해주거나, 촬영하기 전에 미리 맛을 본 후 그것을 맞히는 것이다.
맛을 알아맞힌다고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
분식점에서 라면장사를 한다고 하면, 어떤 라면을 사용할 것인가? 모든 사람이 맛있다는 라면을 구입해서 끓여주면 된다. 주인이 꼭 라면 맛을 보고 무슨 라면인지 알아맞힐 필요는 없다. 이 정도 가격에 이 정도 맛이면 충분히 시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라면을 사용하게 되어 있다. 와인도 마찬가지로, 이 정도 맛에 이 정도 가격이면 우리가 수입해도 되겠구나, 혹은, 샵이나 레스토랑이라면 손님에게 얼마든지 추천을 해도 좋겠다고 생각되는 와인을 선택해서 많이 팔면 된다. 맛을 보고 알아맞히는 것은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 나의 입맛과 고객의 입맛에서 최대공약수를 찾으면 된다. 일반 소비자라면 와인 맛을 보고 나에게 맛있다, 맛없다고 느껴지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 맛을 가격과 비교해서 구입하여 맛있게 마시면 더 이상 바랄게 없다.
맛과 향을 공부한다는 것
맛과 향을 배우는 과정은 마치 어린이가 가족을 통하여 말을 배우는 것과 똑같이 이루어진다. 모국어를 배우면서 발음과 문법을 배우지 않듯이 음식을 먹으면서 의식적으로 맛을 배우지 않는다. 맛과 향을 공부한다는 것은 문법을 공부하는 것이다. 우리 술이 아닌 낯선 외국의 술 와인을 배울 때는 영어를 배울 때 문법을 배우듯이 체계적인 공부가 필요하다. 물론 문법을 배우지 않고도 외국어를 배울 수 있듯이 배우지 않고 와인을 마셔도 상관은 없다.
와인 감정가도 전문 분야가 있다
와인 감정 전문가라고 해도 자기가 전문으로 감정하는 지방의 와인이나 타입이 있기 마련이다. 그 많은 와인의 맛을 모두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품종의 특성을 파악하고, 오래된 것인지 아닌지 그리고 가능하다면 지방별로 어떤 타입인지 아는 정도면 충분하다. 이 정도의 경지에 이르는 것도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쌓아야 한다. 와인에서 동물 냄새, 블랙커런트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전문가들이나 책자에서 사용하는 표현이 그대로 나에게도 느껴진다면 좋겠지만, 스쳐 지나가는 뉘앙스이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더군다나 이제 와인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가면서 익숙해지는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는 어림도 없는 소리다. “맛있다”, “맛없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하면 충분하다.
잘난척하는 와인 전문가
어느 나라든 와인에 대한 지식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조금만 알아도 아는 척 하기 좋고, 특히 와인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와인에 대해 장황한 설명과 미사여구를 늘어놓기 때문에 어디서나 미운 털이 박혀 있어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 와인 전문가는 인터넷을 뒤지면서 자기 이름이 나왔는지 살피면서, 저녁 때 좋은 와인과 음식을 공짜로 먹을 곳이 없는지 살피는 사람이다.
* 와인 전문가는 남보다 빨리 라벨을 읽고 간파한 다음에, 와인을 마시고 장황한 설을 풀 수 있는 사람이다.
* 와인 전문가는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할 때는 감기에 걸렸다, 엊저녁에 너무 많이 마셨다는 등 갖은 핑계를 대서 현재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 와인 평론가란 아무도 자기 말을 들을 수 없는 숲 속에 홀로 있더라도 오만하게 허풍을 떨 수 있는 사람이다.
와인 테이스팅은 미술작품 감상
와인 테이스팅은 미술관을 배회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 방 저 방 구경하다가 선호 여부를 떠나서 첫 인상을 좌우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한번 결정하면 여기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진다. 작가가 누구인지? 이 작품의 배경은? 어떻게 그렸는지? 와인도 마찬가지다. 한번 좋아하는 새로운 와인을 만나면, 이 와인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한다. 와인메이커, 포도, 재배지역, 블렌딩 비율, 그리고 환경까지. 좋은 와인이란 당신이 좋아하는 와인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맛을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테이스팅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서, 와인이 나에게 어떻게 해야 즐거움을 주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와인이 진정한 행복과 기쁨의 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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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김준철 (Jun Cheol Kim)
(한국와인협회 회장, 김준철와인스쿨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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