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영의 보르도 샤토 방문기 ‘스물두 번째’ – 샤토 피작(Château Figeac)
정민영의 보르도 샤토 방문기 ‘스물두 번째’ – 샤토 피작(Château Figeac)
모든 이가 어제의 일들을 과거라는 이불을 덮고 곤히 잠든 이른 새벽. 고요하다는 단어보다는 적막하다는 단어가 더욱 어울릴 것 같은 이 시간! 시계는 새벽 4시 20분에서 잠시 쉬고 있다. 어색한 양복을 입고 선보러 나온 시골 총각처럼 듬성듬성 뻣뻣이 서있는 전봇대의 가로등만 환경미화원의 이른 새벽 친구가 되어주는 새벽시간!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토막토막의 풍경은 아무 변화가 없다. 진짜 시간이 멈추어 버린 건 아닐까? 아니, 이렇게 시간이 멈춘다면? 하는 스쳐 지나가는 쓸데없는 잡념도 해 본다. 2층에서 내려다보는 오렌지색 가로등 불빛들은 밤에게 미안한 듯 너무 밝지 않게, 멋진 강줄기의 흐름과 같아 보인다. 강물에서 꿈틀거리는 물고기의 움직임처럼 나 또한 흰색 종이에 내 마음의 발자국을 찍어본다.
나도 이런 식으로 나의 샤토 방문기를 쓰고 싶다고요!!! 그런데, 지금 몇 시야? 주방의 시계는 아침 9시 45분인데도 집에 있는 인간들은 주말이라 일어날 생각조차 안하고…… 가로등은커녕 앞 집 공사한다고 때려 부수는 소리, 드릴로 벽을 뚫는 소음과 트럭들 왔다 갔다 하는 굉음을 들으면서 샤토 피작(Château Figeac)의 방문기를 적어보자.
먼저, 샤토 피작에 대한 설명은 포도밭 토양과 포도 품종부터 시작을 해보자. 샤토 피작은 AOP 생테밀리옹이고 그랑 크뤼 클라세 B등급에 이름을 올려놓은 샤토이기도 하다. 그리고, 와인 마니아의 지갑을 꾀나 가볍게 만드는 샤토 슈발 블랑(Château Cheval Blanc)의 바로 옆집이다. 지나간 이야기를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만은, 샤토 피작의 포도밭은 한 때(200년 전)는 60만 평 크기의 포도밭을 소유했던 어깨에 힘 좀 줬던 샤토였다. 하지만 포도밭은 두부 토막 팔려 가듯이 주위의 샤토들에게 토지대장 이름을 넘겨 주었다. 그 주위의 샤토들인 샤토 슈발 블랑, 샤토 그랑 바헤으(Château Grand Barrail), 샤토 코네 피작 마냥(Château Cormeil Figeac Magnan) 등등과 아펠라씨옹은 다르지만 뽀므롤의 샤토 라 콩세이엉트(Château La Conseillante) 또한 피작의 포도밭이었다. 현재는 120,000평이 남아있고, 이중 8만평 정도에만 포도가 심어져 있다. 그래도 생테밀리옹에서 40헥타르(12만평)의 포도밭 크기는 생테밀리옹 그랑 크뤼 클라세 샤토에서는 찾기가 힘들다. 참고로 현재 샤토 슈발 블랑의 포도밭 크기가 41헥타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생테밀리옹의 포도밭 토양은 진흙과 석회석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메를로 포도 품종이 적합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논리다. 그렇지만 샤토 피작의 포도밭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 생테밀리옹 토양과 다르다. 메독 지역의 토양과 비슷한 자갈 토양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샤토 피작의 포도밭에 심어져 있는 포도는 메를로 품종보다는 카베르네 소비뇽, 카베르네 프랑의 비율이 더 높다. 이런 현상은 샤토 슈발 블랑도 마찬가지다.
샤토 피작과 샤토 슈발 블랑의 블랜딩 비율을 보면, 다른 생테밀리옹의 와인처럼 메를로의 비율이 높지 않다. 3가지 품종을 거의 균일하게 섞던지, 카베르네 소비뇽과 카베르네 프랑의 비율이 메를로의 비율보다 조금 높은 게 일반적이다. 포도밭 토양과 품종에 관해서는 여기까지 설명하기로 하고, 이제 커피 한 잔 마시고 샤토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이야기해보자.
샤토에 예약한 시간에 더도 덜도 없이 정확한 시간에 도착했다. 포도 수확이 한참 진행 중이어서, 밖에 쳐놓은 천막에서는 ‘포도 걸러내기’ 작업에 일하는 사람들이 집중하고 있었다. 내가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얼굴 표정들이 좋아하는 듯한 기색들은 아니었다. 하기야 일하고 있는 사진을 찍는데 뭐가 좋다고 나에게 미소를 띄우겠는가? 그렇다고 못 찍게 하지는 않았지만 얼굴이 나오지 않게 뒷모습 정도만 찍었다.
투어는 14명 남짓한 인원이 참가했다. 브라질 커플, 중국 커플 그리고 체코에서 온 가족들이 있었다. 체코에서 온 가족들은 건장한 아들 두 명이 아버지 환갑 기념으로 같이 보르도 와이너리투어를 결정했다고 한다. 사실 이 체코 가족들은 샤토 피작을 방문하기 전날 샤토 무통 로칠드에서 만났었기 때문에 초면은 아니었다. 지역이 다른 샤토에서 같은 날짜, 같은 시간에 같이 샤토 투어를 한다는 것이 확률적으로 흔한 일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 가족은 체코에서, 나는 프랑스에서 똑같은 생각을 하고 계획했다는 것 때문에 세상에는 이러한 인연이라는 것도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브라질 커플과 중국 커플에 관해서는 마지막쯤에 다시 설명하기로 하자. 샤토 투어를 하는 내내 샤토 직원을 포함한 우리 그룹은 얼굴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이유는, 와인을 좋아(?)하기에는 조금은 어린 친구가 있었는데,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막 한 살이 됐고 걸음마를 막 배우기 시작한 것 같다. 울지도 않고, 시끄럽지도 않고 사부작사부작 자기가 관심이 있는 곳으로 로봇 청소기처럼 이리저리 자리 이동만 했다. 물론 엄마는 샤토 직원의 설명에 집중할 수가 없었지만 말이다.
와인 생산과정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우리는 포도밭으로 나가게 됐다. 코스모스 꽃밭 너머로 바로 샤토 슈발 블랑의 머리통(?)이 약간 보였다. 갑자기 옛 샤토 피작의 영광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 기분 아닐까? 한국 전쟁 끝나고 압구정동에 밭 있던 사람들이 정주영에게 땅 팔고 2017년 압구정동을 다시 바라보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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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정민영 (Min Yo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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