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영의 보르도 샤토 방문기 ‘스물네 번째’ – 샤토 오브리옹(Château Haut-Brion)
사람들은 나를 “두드린다”고 표현한다. 내가 이 집으로 이사온 지 1년 정도가 되가는 것 같다. 혼자 오지는 않았다. 나는 항상 친구들과 같이 다닌다. 그 중에 한 친구는 컴퓨터라는 놈이다. 꽤나 똑똑해서 거의 모든 것을 다 할 줄 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또 한 친구의 이름은 모니터라고 한다. 제일 많이 대감과 눈을 마주 치는 놈이다. 모니터가 보여주는 대로 대감은 웃기도 하고, 인상을 찌푸리기도 한다. 재미있는 건 이 모니터가 야한 동영상을 보여주면 대감은 2시간을 쳐다봐도 지치는 기색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친구의 이름은 마우스다. 마우스와 나는 거의 같은 일을 한다.
차이가 있다면, 대감은 마우스를 손 바닥으로 어루만져주고, 나는 손 끝으로 쳐준다는 것이다. 충격은 내게 더 있지만 아프지는 않다. 대감 손톱이 길 때만 빼놓고는…… 그렇다. 내 이름은 자판기이다.
영어 이름도 있다. 성은 Key요, 이름은 Board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 성과 이름을 같이 붙여 부른다. 상관없다. 키보드라고 해도 좋고, 자판기라고 해도 내가 마음 상하는 일은 없다. 다만, 자동판매기의 “자판기”와는 구별을 해줬으면 하는 것뿐이다.
대감은 별명이다. 나와 우리 친구들의 주인 별명이 보르도 대감이다. 대감 나름대로는 고민을 해서 지은 별명인 듯했다. 강한 인상은 없지만, 오래 기억할 수 있는 별명이라고 지은 것 같다. 우리는 이렇게 항상 같이 움직인다. 본체라는 친구가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내가 없으면 바퀴 없는 12기통 페라리와 같다. 움직이지를 못한다. 모니터도 내 도움 없으면 TV의 화면 조정시간하고 똑같다.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마우스도 혼자 있으면 부서진 벽돌처럼 아무 소용이 없다.
쥐도 못 잡는 마우스! 인간들이 본인들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듯이 우리도 혼자서는 살 수 없다. 항상 서로 의지해야 하고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대감은 오늘도 내 옆에 커피 한 잔을 놓고 앉았다. 거의 매일 같은 패턴이다. 아침에 나를 두드릴 때는 커피를, 저녁에 나를 두드릴 때는 와인이다. 나는 그래서 커피 향과 와인 향에 익숙해져 있다. “오늘은 커피를 엷게 마시는 군. 마시는 와인이 진하네!”라고 말할 정도의 능력은 된다.
나는 향으로 만족한다.
맛보는 건 싫다. 맛보다가 내가 잘 안 움직이면 나를 갖다 버릴게 분명하다. 향으로 만족하지만, 한가지 바램은 있다. 재치기 할 때 입 좀 가리고 했으면 좋겠다. 사람들 있을 때는 나름대로 교양이 있는 척 입을 가리고 재치기를 하지만, 대감 혼자 있을 때는 침이 사방팔방으로 튀도록 큰 소리를 낸다. 기분 나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은 재치기 할 때 침이 튀면 모니터는 닦아준다. 그것도 이리저리 번짐이 있나 없나 확인하면서 꼼꼼히 닦아주지만, 내게는 눈길 조차 주지 않는다. “세상은 공평하지가 않다는 게 맞는 말인가 보다.”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다.
오늘도 대감은 샤토에서 찍어온 사진들을 이리저리 꺼내어 보고 또 본다. 마치 낚시터의 꾼처럼 어떤 고기를 낚을까 하는 심정으로 사진을 돌려보며 고민을 한다. 내가 보기엔 대단한 작업도 아닌 것 같은데…… 대감 나름대로는 신중을 기하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좀처럼 찍을 수 없는 사진들 혹은 신기한 사진들을 고르고 골라서 대감의 글을 읽는 사람들의 조회수를 늘리려고 계산하는 것 같다. 나는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다. 그래야 대감도 불평을 안 한다.
대감이 뭔가 결심을 했다. 샤토 오브리옹(Château Haut-Brion)으로 정한 것 같다. 오늘은 대감과 함께 샤토 오브리옹에 대해서 알아보자.
우리가 흔히 말하는 5대 샤토들은 간판이 화려하지 않다. 멀리서도 반짝이는 네온 사인으로 “나 여기 있소”를 알리는 표시가 없다. 하기야 중세 풍의 돌로 쌓은 건물에 빠찡꼬 네온사인도 조화가 안 맞기는 하다.
샤토 오브리옹이라는 글씨는 벽에 위풍당당하게 박혀있었다. 샤토의 문은 안에서 열어주기 전에는 열리지 않는다. 사무실 옆에 있는 초인종으로 내가 왔음을 알렸다. 탈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샤토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바쿠스가 가릴 곳만 가리고, 나체로 서있는 채 나를 반기는 듯, 관심이 없는 듯 서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오브리옹의 직원이 나와 인사를 나누었다. 직원은 나를 2층으로 안내했다.
샤토들도 유행이 있다. 와인 양조에 대한 유행도 있고, 손님을 맞이하는 방법의 유행도 있다. 2층으로 나를 안내한 이유는 그곳에 자그마한 극장(?)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오브리옹의 역사에 대해서 시청각 교육이 이루어진다. 이런 손님맞이 유행은 5년 전 즈음부터 유행하고 있다. 이 방법을 계속 유지하는 샤토도 있지만, 처음에는 시도하다가 나중에는 효율적인 면을 따져서 그만 둔 곳도 있다.
10분 정도의 시청각이 끝나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와서는 영상이 설명해주었던 내용을 직원의 목소리로 요약하는 시간이 시작됐다. 요약한 내용 중에 아주 흥미를 끄는 이야기가 두 개 있었다. 그 중에 하나는 숫자와 관계가 있었고, 다른 하나는 양조와 관계가 있었다.
숫자는 역시 돈과 관련된 사항이다. 샤토 오브리옹은 긴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주인이 바뀌었다. 그런데 1800년 초기에는 매매 계약서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다른 사람에게 팔릴 정도였다. 그렇게 사고 팔리고가 빈번히 반복되다가 결국에는 경매에까지 나왔다. 경매에 나온 오브리옹은 팔리지 않아서 몇 번이나 유찰됐다고 한다. 직원은 오브리옹이 경매로 낙찰될 때는 아주 헐값이었다고 웃으면서 설명했다.
지금 아파트도 경매에 나와서 한 번 유찰이 될 때마다 경매가에서 20% 빠져나간다. 글쎄 떠돌아다닐 정도로 경매가 유찰이 됐다면, 마지막 입찰 가격은 얼마였었을까? 아마 이 상황이 똑같이 지금 시대에 다시 벌어진다면, 아마도 샤토 오브리옹의 주인은 중국 여권을 갖고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양조에 관해서 흥미를 끌었던 사항은 Vat이라고 하는 통 중간 부분을 비스듬히 경계를 해놓는 것이었다. 사진을 보면 좀 더 이해가 쉬울 듯하다.
“여보세요!” 대감한테 전화가 걸려온 듯하다. 대감은 나를 두드리다 말고 핸드폰을 들고 침대에 벌러덩 눕더니 흥얼흥얼 전화를 걸어온 사람과 수다를 떨기 시작한다. 왠지 전화는 바로 끊을 것 같지않은 대화인 듯하다. 그럼 나도 좀 쉬어볼까! 내 친구 본체와 모니터는 이때 나를 가장 부러워한다. 대감이 나를 두드리지 않을 때, 나는 쉴 수 있지만 모니터는 항상 눈을 부라리고 뜨고 있어야 하고, 본체라는 놈도 뭔가 계속해서 멈추지 않게 소소하게 일을 해야 한다. 내가 자판으로 태어나서 누릴 수 있는 행복감이라고나 할까!
대감의 사모가 대감을 찾는다. 점심을 먹으라고 하는 것 같다. 나는 대감이 오늘 먹을 점심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라면 스프 냄새가 방 안까지 슬금슬금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 집에서 라면 냄새는 오랜만에 맡는다. 전에는 대감이 라면을 자주 먹는 것 같더니, 언제부턴가는 라면 대신에 국수를 먹는지 매콤한 스프 냄새가 나질 않았다.
대감이 방에서 나간다. 주방에서는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대감과 사모가 뭔가를 이야기한다. 들릴 듯 말 듯한 대화 내용이었다. 어쨌거나 난 대감이 다시 와서 모니터를 쳐다볼 때가지는 간섭 받지 않고 편안히 쉴 수 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감이 다시 의자로 와서 앉는다. 아니나 다를까 대감은 라면을 먹은 것이 틀림없다. 숨을 쉴 때마다 라면 스프 냄새가 난다. 모니터 앞에서 코를 한 번 풀더니, 내 옆에 놓여져 있는 식은 커피를 마신다. 오늘은 대감이 설거지를 하지 않나 보다. 대감은 지금 나를 두드리고 있고, 주방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 달가닥 달가닥 하는 설거지 소리가 들린다. 대감은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더니 본인이 어디까지 쓰다가 나갔는지 내용을 다시 한 번 읽어본다. 그리고는 다시 나를 두드린다.
샤토 오브리옹의 직원은 Vat(스테인 레스 저장통)의 중간부분을 비스듬히 경계를 나눈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포도를 수확해서 알코올 발효를 시킨 다음에는 포도씨나 껍질을 Vat 통에서 꺼내는 작업을 한다. 이때 사람들이 직접 통 안으로 삽을 들고 들어가서 작은 문으로 껍질과 포도씨 등을 퍼낸다.
우리는 이런 작업을 “재미있네! 못 보던 작업이네!”라고 하나의 볼거리로 여길 수 있지만, Vat 안에 들어가서 작업을 하는 것은 생각보다 중노동이며 위험하다. 더군다나 발효를 끝낸 포도 껍질들은 열을 발생하고, 통 안에는 이산화 탄소가 많이 있기 때문에 일하는 도중 산소 부족으로 사람이 쓰러지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탄광의 광부들이 갱도에 들어가서 작업을 할 때, 새장에 카나리아 새를 가지고 들어 간 이유도 산소부족, 유해독성을 미리 알기 위해서였다. 새들은 인간보다 폐가 작기 때문에 산소가 부족하면 바로 죽는다. 광부들은 재빨리 갱도에서 나와야 하는 알람 같은 기능으로 새장을 사용했다. 물론 새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파리를 들고 들어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Vat 통을 중간에 사선으로 해놓으면 발효가 끝난 포도 껍질을 수거할 때 훨씬 쉽고, 위험도 줄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가지 더 효과적인 사항은 2차 발효(malolactique fermentation) 도 같은 통에서 할 수 있기 때문에 공간 활용의 효율성 또한 높다. 이러한 시스템을 처음 갖춘 곳이 샤토 오브리옹이라고 직원이 설명한다.
분주하게 일하고 있는 오크통 저장고를 지나서 테이스팅 룸으로 향했다. 테이스팅 룸은 짙은 카키색이라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좀처럼 테이스팅 룸에는 사용하지 않는 색깔로 장식이 되어있었다. 아마도 내 생각으로는 테이스팅 보다는 리셉션에 비중을 두고 있는 듯했다.
테이스팅 와인은 두 종류였다. 샤토 오브리옹 그리고 샤토 라 미씨옹 오브리옹 2007년산이었다.
여기서 한가지 추가 설명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샤토 오브리옹의 세컨 레이블을 샤토 라 미씨옹 오브리옹(Château la Mission Haut-Brion)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샤토 오브리옹의 세컨 레이블은 르 끌레렁스 드 오브리옹(Le Clarence de Haut-Brion)이고, 샤토 라 미씨옹 오브리옹의 세컨 레이블은 라 샤뻴르 드 라 미씨옹(La Chapelle de la Mission)이다. 혼동될 것도 없다. 이것 하나만 알아두면 된다. 샤토에 퍼스트 레이블, 세컨 레이블이 있는 경우, 퍼스트 레이블에는 샤토라는 이름을 레이블에 적지만, 세컨 레이블에는 샤토라는 이름을 적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시음을 마치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밖의 푸릇푸릇한 포도밭 공기는 코가 시릴 정도로 상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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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정민영 (Min Yo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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