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영의 보르도 샤토 방문기-1편
‘보르도’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와인’일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산지이니까.
그리고 와인을 생산하는 ‘샤토’들. 사람들마다 미의 기준이 다르겠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그랑 크뤼 샤토들 중에서도 예쁜 샤토들이 가장 많이 몰려있는 지역이 생-줄리앙(Saint-Julien)이라고 생각한다.
이곳에 자리잡고 있는 샤토들 중에는 샤토 그뤼오 라로즈(Château Gruaud Larose), 샤토 베슈벨(Château Beychevelle) 그리고 샤토 라그랑주(Château Lagrange)는 조경을 예쁘게 해놓아서 점심 도시락을 싸 들고 가서 피크닉을 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생-줄리앙은 일반적으로 마고(Margaux)지역의 여성스러운 부드러움과 포이약(Pauillac) 지역의 남성다운 힘이 아주 조화롭게 만나는 와인을 생산하는 지역이라고 알려져 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그랑 크뤼 와인’이라는 수식어보다는 ‘히딩크 와인’으로 더 많이 알려진 샤토 탈보(Château Talbot)도 생-줄리앙에 위치해 있다.
샤토 탈보의 토양은 퇴적 석회암층에 모래 그리고 감자만한 크기의 자갈로 이루어져 있다. 옆 동네인 포이약 쪽으로 경사면을 이루고 있으며 포도씨까지 선탠을 시킬 정도로 일조량도 풍부하다.
샤토 탈보 방문은 다른 어느 샤토 보다 어렵게 예약이 됐다.
당시 샤토 탈보는 내부 공사중이어서 안전상의 이유로 방문객의 투어는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몇 번에 걸친 설득 끝에 샤토를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되었다. 예약시간에 늦지 않게 샤토 정문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샤토 탈보의 홈페이지에 떠있는 짙푸른 넝쿨이 샤토의 건물벽을 포장하고 있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이유는 샤토의 건물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없고, 굳게 닫힌 철문을 통해서 측면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문에서 초인종을 누르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설마, 내 예약이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 ‘나를 잊어버린건가?’ 등등 어렵게 예약이 된 샤토라서 그런지 침묵으로 대답하는 초인종에 아랫배가 쪼여왔다.
땅 바닥에 떨어트려도 전혀 아깝지 않은 오래 된 전화기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샤토에 전화를 했더니, 직원은 나에게 다른 입구를 알려주었다. 직원에게서 안내 받은 곳으로 굽이굽이 다시 입구를 찾아 나섰다.
샤토 사무실 쪽으로 들어서자, 공사때문인지 서류들이 사무실 밖으로 나와있었다. 서류들은 테이블 위에서 심통을 부리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샤토 내부는 뿌연 공진가루를 날리며 공사가 한참 진행 중이었다. 그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눈에 띄는 중년 여성 한 명이 있었다. 내가 온 것을 확인하고는 나를 향해 가볍게 인사를 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라는 간단한 말과 함께 고속버스 터미날에서 깨끗한 화장실 칸을 찾듯이 이곳 저곳 사무실 문을 열고 들락날락 했다. 언뜻 봐도 하는 일이 많아 보였다. 샤토의 행정뿐만 아니라, 나 같은 방문객에게 투어까지 해 주어야하니, 샤토 예약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10분쯤 지났을까? 중년 여성은 겨우 안정을 되찾는 듯 했다. 마침내 투어가 시작 되었다. 샤토 대부분의 투어가 그렇듯이 샤또의 역사, 규모, 포도 종류, 양조 과정 등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투어는 시작되었다.
샤토 탈보의 몇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이야기 해보자.
포도밭 크기는 100 헥타르가 넘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면적의 단위인 평수로는 300,000평 이상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렇게 큰 포도밭에서 수확할 때는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손으로만 수확을 한단다.
이색적인 것은 샤토 탈보에서는 포도수확을 할 때 짚시 그룹도 포도 수확에 참여를 한다는 것이었다. 샤토 매니저가 짚시 짱(우두머리)과 친분이 있어서, 수확시기에 짚시 짱에게 연락을 하면 짚시 부대(?)가 온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는 짚시들에 대한 인상은 도둑이 많고, 무례하고, 게으르고 등등이지만, 직원의 설명에 의하면 포도 수확 때 보여주는 그들의 행동은 내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다른 나라에서 온 어떤 노동자들보다도 더욱 열심히 일하고 책임감있게 일 처리를 해준다는 것이 샤토 직원의 설명이다.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은 샤토 탈보에서도 화이트 와인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총 면적 107헥타르 중의 자투리 7헥타르에서 화이트 와인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생산량이 많지는 않다. 해마다 생산하는 양은 다르지만 5,000병 내외의 화이트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 그렇다면 샤토에서 화이트 와인을 생산하는데 뭐가 흥미롭다는 말인가?
이태리 레스토랑에서 스파게티 메뉴가 있는 것이 흥미로운 일인가? 그 이유는 생-줄리앙뿐만 아니라 메독 지역에서는 화이트 와인에는 아펠라시옹을 붙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자식을 낳았는데 호적에 올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시대는 흐르고 사람의 생각은 바뀌는 법. 메독의 많은 샤토들이 화이트 와인을 시범 삼아 계속 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다른 사례로 샤토 마고에서도 화이트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나는 포도밭에서 토양과 포도수확에 대한 설명을 듣고, 발효탱크가 즐비하게 세워져있는 발효룸에서 샤토 탈보의 와인 제조 과정을 경청해서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와인 테이스팅을 하기위해 와인을 품고 조용히 잠자고 있는 와인 저장고로 자리를 이동했다. 샤토의 꺄브에 들어서는 순간! 꺄브의 분위기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들어가도 압도당할 것임에 틀림없다.
감동, 예술의 소나기를 맞는 듯한 느낌이었다. 웅장한 규모에 단순한 듯 은은한 금빛 조명, 가족애를 상징하는 기둥들. 오케스트라 연주를 눈으로 듣는 것 같았다.
꺄브의 무게를 느끼면서 마신 샤토 탈보의 2006년 빈티지의 테이스팅 노트를 나름대로 적어본다.
지친 하루를 보내고 밤 11시 반에 잠이 들어 곤히 자고 있는데 새벽 4시 20분에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조금만 더 자고 싶은데, 조금은 피로를 덜 풀고 일어나는 것 같은 산도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디켄팅이라도 조금 해 놓았으면 좋았을 텐데,”하는 약간의 아쉬움이 들면서 피어 오르는 붉은 빛 꽃 향과 초콜릿, 그리고 걸죽한 석류와 블랙커런트 향, 시가, 그리고 스치는 계피 향은 조금 전 부주의로 멍든 타박상의 아쉬움을 달래주기에 충분한 처방전이었다.
테이스팅까지 마치고 나오면서 직원은 나에게 문의 손잡이를 보라고 말했다. ‘T T’라는 알파벳 철자가 손잡이로 되어 있었다.‘TalboT’의 T T를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작은 일이지만 곳곳의 세심함과 정성은 또 하나의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샤토 탈보의 방문이 끝나고 샤토를 떠나면서 아이러니 하다고 생각된 것은 ‘탈보’는 영국과 프랑스가 100년 전쟁을 치를 때 영국을 위해 싸운 영국의 장군 존 탈보(John Talbot)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이다.그런데 프랑스를 적으로 싸운 영국 장군의 이름을 지금까지 샤토에 붙여서 쓴다는 것은 나와 동시대에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고개를 한 번쯤은 갸우뚱 하지 않을까 싶다. 마치 압구정동에 손님이 바글바글한 감자탕집 이름이 ‘이토 히로부미 뼈다귀 해장국집’ 같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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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정민영(Min Yo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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