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와인 Jumilla(후미야)
스페인 와인 Jumilla(후미야)
스페인 와인에 대한 글을 시작하며
2000년 초기 웰빙 바람과 함께 와인은 우리 곁에 머물기 시작했다. 초기 명품으로 불리던 고가의 프랑스와 이탈리아 와인의 매혹에 빠져 시작된 와인 문화는 10여 년 전 칠레 와인을 통해 일상으로 스며들었다. 이제 손쉽게 마트에서도 와인을 즐길 수 있는 최초 성숙기에 도달한 지금 우리 식탁에 와인의 다양성이 필요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책에서 읽었던 A.B.C!(Anything But Cabernet!: 아무거나 주세요. 까베르네 소비뇽만 말고요!). 이 말처럼 이제 우리도 까베르네 소비뇽과 샤르도네를 잠시 내려놓고 ‘다양성을 즐길 시기가 도래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누군가 새로운 와인을 즐길 계기가 된다면 좋겠다. 일상에서 와인 한 병이 가져다 주는 즐거움을 기대하며.
칠레의 어느 와인 메이커가 한 말인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된다. 대략 다음과 같았다.
“나는 평론가나 부자들을 위한 와인을 만들 생각이 없다. 오직 내 연인, 가족, 친구들과 즐길 와인을 만들고 즐기고 싶다. 그런 것들이 이 풍진 세상의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벌써 10여 년 전에 들었던 말이었지만 아직도 내게 울림이 있는 문장이다. 나 또한 독자들과 그런 즐거움을 함께 나누었으면 더 할 나위가 없겠다.
Jumilla(후미야)
영어 발음에 익숙한 보통의 우리에게 Jumilla(후미야)의 `J` 발음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지만 우리가 피자와 함께 즐기는 할라피뇨(Jalapeño)를 잘라피뇨라고 발음하지 않듯이 스페인 언어의 발음특성으로 이해하면 된다.
후미야 마을은 과거 스페인의 벌크 와인 산지 중 한 곳에 불과했으나 1990년대부터 신흥산지로 급부상하였다. 호주와 캘리포니아처럼 건조하고 더운 지역이지만 높은 해발고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큰 일교차로 와인의 밸런스에 도움을 주는 떼루아를 갖고 있다.
이 마을을 대표하는 포도 품종은 모나스트렐(Monastrell)이다. 포루투갈에서는 Mataro(마따로), 프랑스에서는 Mourevedre(무르베드르)로 불린다. 프랑스 루시옹의 알코올 강화 와인과 남부 프랑스의 샤또네프 뒤 빠쁘, 방돌(Bandol) 등의 유명 와인에 사용되어 프랑스 토착 품종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모나스트렐은 스페인의 토착 품종으로 16세기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따로와 무르베드르는 각각 까딸루냐 지역의 Mataro(마따로) 마을과 발렌시아 지역 근처의 Mourviedro(무르비에드로) 마을 이름에서 각각 비롯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보조 품종에 불과하지만 모나스트렐은 매우 덥고 건조한 대륙성 기후와 풍부한 일조량을 통해 뛰어난 품질의 와인으로 양조될 수 있다. 이러한 떼루아를 갖춘 곳이 바로 후미야 마을이고 이곳에서 오랫동안 뿌리내려 살아온 품종이기도 하다.
흔히 포도나무를 사람의 인생과 비유하여 설명한다. 어린 아기가 섬세한 보살핌이 필요하듯 포도나무 또한 보통 5살이 될 때까지 충분한 수분을 필요로 하고 바람 등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이후 성장기인 소년기에는 포도나무 역시 아직 미성숙한 풋내를 동반한다. 사람이 청장년기인 20대에서 40대에 걸쳐 활발한 에너지를 뿜어내듯이 포도나무도 포도송이 생산의 절정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후 중년기, 노년기에 이르러서 생생한 활력 대신에 원숙미를 갖추게 되듯이 포도나무 역시 생산량은 줄어들지만 오랜 기간 깊이 내려진 뿌리에서 여러 가지 무기질 및 영양소를 보다 더 흡수하여 생산량보다는 원숙미에서 오는 복합미와 농축미를 지니게 된다. 특색 있는 포도 품종과 최적의 떼루아. 그곳에서 터줏대감처럼 나이를 먹으며 자라온 오래된 포도나무. 이것이 후미야 와인의 화룡정점을 만들어 준다.
<후미야의 모나스트렐 와인들(왼쪽부터): 후안 길(Juan Gil), 마초맨(Machoman), 까사 드 라 에리미따(Casa de la Ermita)>
전세계적으로 Old Vine(고목)으로 만든 와인이 많지 않다. 대표적인 이유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첫째, 환경적인 요소다. 유럽의 오래된 포도나무들은 미국에서 수입된 포도나무 묘목에 붙어서 유입된 포도나무 뿌리 진딧물(필록세라)의 영향으로 죽어나가고 그 자리에 뿌리 대목으로 심어져 유럽에서 오래된 수령의 포도나무들이 많이 사라졌다.
둘째, 생산성 효율화를 통한 상업적 목적이다. 세계의 주요 와인산지를 둘러보면 통상적으로 40년 이상 된 수령의 포도나무를 뽑고 어린 묘목으로 대체한다. 극단적 예로 미국의 어느 유명 와이너리는 10년 주기로 한 구획마다 어린 묘목을 심는다. 이로써 연속적으로 10년생 포도나무의 포도로만 와인을 만들게 된다.
셋째, 시대의 유행이다. 호주에서 80년대 수출 장려를 위해 수령이 100년 이상 된 오래된 쉬라즈를 당시 인기 품종인 까베르네 소비뇽으로 교체했다. 지금처럼 연구나 체험을 통해 고목에서 만들어진 와인의 가치를 알지 못했던 시기라 안타깝기만 하다. 또한 지금 현존하는 고목을 갖고 있는 와이너리들도 대부분 방치되었거나 잊혀진 포도밭들을 재건 또는 발견한 경우가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넷째, 가격의 접근성이다. 고목에서 나오는 적은 소출의 포도로 와인을 만드는 것은 보통 타산이 맞지 않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동급의 와인 보다 곱절 이상의 가격을 책정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미국 소노마 카운티의 세게지오 진판델(Seghegio Zinfandel)과 세게지오 올드 바인 진판델(Seghegio Old Vine Zinfandel)이 대표적인 예이다. 맛을 비교해 보면 젊은 나무에서 만든 싱싱한 와인과 고목에서 만든 진중한 와인의 진수를 구별하면서 체험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호주의 올드 바인 쉬라즈 또한 그 적은 생산량으로 높은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
위 내용과 비교해 후미야 와인의 가장 큰 장점은 마을 자체가 오래된 모나스트렐의 마을이라 상대적으로 가격은 낮으면서도 높은 품질을 자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왜 후미야 마을은 포도나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우선 스페인의 와인 산업이 과거 프랑스처럼 초기부터 상업성에 기반을 두지 않았던 것을 그 이유로 들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와서 다시 오래된 모나스트렐을 뽑을 수 없는 이유는 그 오랜 시간에 걸쳐서 뿌리 뻗은 포도나무의 뿌리가 지하에서 서로 얽히고 설켜있기 때문이다. 와이너리의 모든 포도나무를 뽑아 교체하지 않는 이상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 덕분에 이 혜택을 현실의 우리가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나이로 말하자면 나의 할아버지 포도나무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것 또한 다른 의미에서의 밸류 와인(Value Wine)이라 규정할 수 있겠다. 우연과 함께 만들어진 규모의 경제학에서 오는 이로움을 굳이 마다할 필요가 있겠는가! 요즘 스페인 레스토랑을 주위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바야흐로 식당메뉴에 이베리코 하몽이 낯설지가 않은 시대가 도래하였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식문화 자체에 괄목할 만한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는 스페인. 그 중에 오늘은 모나스트렐로 만든 후미야 와인을 여러분께 추천하고자 한다. 높은 알코올과 부드럽고 거칠지 않은 탄닌이 입안에서 풍부한 부케와 함께 만족감을 선사한다. 싱싱하고 잘 익은 붉은 과일의 풍미와 함께 때때로 생고기의 풍미, 건조한 흙 내음 같은 미네랄 풍미가 어우러진다. 때문에 굳이 육류 스테이크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음식과 무난한 조화를 이끌어 내는 장점이 있다.
WRITTEN BY 이정훈(Jung Hoon Lee)
그랜드 워커힐 호텔 소믈리에
2013년 한국 국가대표 소믈리에 경기대회 우승
2015년 한국인 최초 A.S.I.(세계소믈리에협회) 공인 Diploma 획득
2015년 Asia-Oceania Best Sommelier Contest(세계소믈리에협회 주최) 한국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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